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 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주재한 사장단 회의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조적 경영”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더 이상 남의 것만 카피해선 독자성이 생겨나지 않는다”,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하는데 등대가 없다”는 표현을 쓰며 창조경영을 통해 미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다음달이면 이 회장이 창조경영을 주창한지 1년이 된다.
하지만 “창조경영이 뭐냐”는 질문에 삼성의 고위임원조차도 “이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도 창조경영 자체가 완결된 언어가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 및 생산 현장에서 당면 과제들과 씨름하며 하나하나 채워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삼성맨들 사이에 하나의 공감대는 있다. 새롭고 획기적인 제품을 통해 시장을 개척ㆍ리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이런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한 숨은 활동들이 삼성의 각 사업장에서 조용한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회장의 창조경영은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 지, 그 현주소를 3회에 걸쳐 점검해 본다.
멧돼지를 생쥐로 만들어라
“모든 것에 대해 왜? 왜? 왜? 세 번 이유를 묻고, 문제가 있으면 개선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
박종우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은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Think and Innovate)이 바로 창조경영”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물증’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31일~9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 가전전시회(IFA)’에서 세계 정보기술(IT)업계를 놀라게 할 신제품을 공개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바로 두께가 11㎝에 불과한 신개념 프린터 ‘스완’(백조)이다. 멧돼지를 생쥐로 바꿔놓은, 거대한 타조를 어여쁜 백조로 변신시킨 작품이라는 게 자체 평가다.
사실 초슬림 디자인에 삼성의 최첨단 IT기술을 접목시킨 이 제품은 프린터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왜 프린터는 덩치가 커야 할까’, ‘꼭 책상 밑이나 후미진 곳에만 둬야 하나’, ‘흰색이 아니라 검정색의 깜찍한 소품은 될 수 없을까’‥.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 지난해부터 상품 기획자 및 디자이너, 제품 개발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책상 위의 아름다운 소품 같은 프린터, 기존 프린터보다 두께를 2.5~3배 이상 줄인 11㎝짜리 깜찍한 신제품을 만드는 데로 모아졌다.
발상 전환은 이뤘지만, 기술적 장벽이 적지 않았다. 레이저 스캔, 토너, 프레임, 메인 컨트롤러 등으로 구성된 프린터의 몸집을 줄이는 것 자체가 커다란 숙제였다. 1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핵심 부품들의 크기를 최소하고, 이를 다시 고밀도로 짜맞추는 방법을 고안하는데 성공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거실의 가구’라는 신개념으로 지난해 세계시장을 휩쓸었던 보르도 LCD TV처럼, 스완은 ‘책상 위의 소품’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뛰어난 기술이 결합된 개가”라고 강조했다.
차별화로 시장을 열광시켜라
삼성그룹 고위관계자는 “경영에서의 창조는 새롭고 색다른 예술적 창조와 검증ㆍ반복 가능한 과학적 창조 등 두 가지에다 돈 되는 제품ㆍ 서비스를 합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발상의 전환 뿐 아니라 수익성까지 겸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즉, 이 회장의 창조경영은 ‘시장이 열광하는 혁신 제품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창조역량을 갖추는 경영’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광’ ‘혁신’ ‘지속’의 코드를 모두 충족시키는 제품ㆍ서비스 개발은 어떻게 가능할까.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는 가치혁신 프로그램(VIPㆍValue Innovation Program) 센터가 있다. 각 사업 부서들이 소비자들에게 혁신적 제품을 제공하고, 생산원가를 낮추는 방식을 개발토록 지원하는 곳이다. 와인잔을 닮은 보르도 TV, 핸드백에 넣는 노트북인 센스Q1 등 삼성전자의 히트작들이 이곳에 들어와 짧게는 6주, 길게는 1년간 ‘차별성’과 ‘사업성’을 1차적으로 검증 받았다. 이번에 세상에 내놓을 스완도 마찬가지다.
VIP센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협업팀(CFT) 구성. 마케팅, 제조, 다지인, 기획 등 상품 개발 전단계의 관련 직원들을 한데 모아 만든 팀이다. 구성원 모두가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도록 서로의 벽을 허물기 위해 상황극 연출, 영화관람 등 다양한 체험도 함께 한다. 이를 통해 얻어진 아이디어는 과학적 기법을 통해 걸러진다. 새로운 사업영역을 찾는 블루오션 전략의 핵심도구인 ‘전략 캔버스’(경쟁사의 제품과 삼성전자 신제품의 강ㆍ약점은 물론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치를 한 장에 표현한 그래프) 기법을 통해 상품의 컨셉트를 시각화하는 등 체계적인 방법론을 동원해 시행착오를 줄인다. 1998년 처음 설립된 VIP센터에서 쓰는 이들 방법론은 최근 창조경영이 강조되면서 각 사업 부서별 자체 아이템 채택에 필수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VIP센터 이동진 센터장(상무)은 “수 많은 아이디어가 실제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지를 삼성만의 방법으로 검증해 성공 확률을 끌어올리고 있다”며 “VIP의 방법론이 센터를 넘어 삼성전자 각 사업부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회사의 창조역량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진용 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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