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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기획/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 본질과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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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기획/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 본질과 해법은

입력
2007.08.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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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남북정상회담 의제 채택 여부와는 별개로 NLL 문제는 본격적인 남북 협력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안보 분야의 핵심 현안이다. NLL 논란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짚어본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가 본격적인 안보 현안으로 부각한 것은 1999년 6월 연평해전 이후다. 당시 NLL을 월선한 북한 경비정을 해군이 선체를 충돌해 밀어내는 전법으로 막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2002년 서해교전은 NLL이 남북간 일촉즉발의 대치선임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다. 이에 따라 NLL은 지금까지도 대체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영토’ 개념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NLL 원조는 ‘클라크 라인’

NLL 문제는 1953년 정전협정에서 서해상의 남북 군사분계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데서 태동했다. 정전협정은 서해상의 남북 분계를 이른바 ‘한강하류 수역’(한강과 예성강 합류 지점부터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해안을 지나 황해도 굴당포 앞바다까지 수역)의 남북 중간선에서 강화도 서쪽 약 30㎞ 지점 우도(隅島)까지 연결한 선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도 너머 백령도까지, 현재 NLL이 지나는 100여㎞ 서해상에는 분계선을 정하지 않았다. 정전 당시 서해 섬의 대다수는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논란 끝에 섬의 통제권을 ‘전쟁 발생 전날인 1950년 6월24일’을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협정에서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이른바 ‘서해 5도’만을 유엔연합군 총사령관 통제 하에, 그 해역의 다른 섬들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통제 하에 둔다고 규정했다.

현재의 NLL은 애초 유엔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한국전쟁중 외부로부터 중공군과 북한군으로의 무기ㆍ물자 공급을 막기 위해 그은 ‘클라크 라인’이었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논문 ‘북방한계선은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가’에 따르면 남북 분계를 위한 의도가 전혀 없었던 이 선은 정전협정 발효 한 달 뒤인 53년 8월27일 폐기됐다. 하지만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진 통일을 희망하던 당시 이승만 정권의 서해상 군사행동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 선을 남측 군사행동의 한계선으로 삼았고, 이후 NLL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재협의 규정

정전협정 이후 서해 군사분계 문제를 문서로 다시 거론한 것은 1992년 체결ㆍ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불가침 부속합의서에서다. 불가침 부속합의서 제10조는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서해 분계가 정전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확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NLL은 군사분계선이 아니라는 재확인인 셈이다.

그러나 해상불가침 경계를 확정할 때까지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을 불가침 구역으로 한다는 대목에 무게를 둔다면 NLL 이남이 사실상의 영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군 당국자는 “육지와 달리 해상에서는 국가간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NLL과 비슷한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이 경우 누가 그 해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느냐에 따라 경계를 가르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라고 말했다.

적극적인 NLL 논의로 긴장 완화 물꼬 터야

이유와 경위가 어찌됐든 NLL 이남의 서해가 한 뼘도 내줄 수 없는 ‘우리 바다’라고 고집하는 것만으로는 서해상의 군사적 긴장 상태를 풀 수는 없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방부와 통일부가 무슨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듯 보이지만 정부 당국자 어느 누구도 NLL을 재논의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없다.

북한은 NLL 문제를 장성급 군사회담 등에서 당장 다뤄야 할 의제로 계속 주장하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 따르자면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국방부는 장관급 회담에서 협의할 수 있다고 계속 밝혀왔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의제로 삼지 않더라도 남북 국방장관 회담 정례화에 합의 한다면 멀지 않은 시기에 본격적인 협의도 가능하다.

이와 관련,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군이 ‘NLL을 인정해야 협의할 수 있다’는 쪽에서 ‘NLL을 협의할 테니 인정하라’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유연한 NLL 접근론’을 편다. NLL 논의를 필두로 서해상의 포괄적인 긴장 완화 조치를 함께 논의하고 아울러 ▦남북 군 인사 교류 ▦핫라인 설치 ▦상호 훈련 통보 및 참관 등 초보적 수준의 군사적 신뢰 구축을 논의하라는 제안이다.

김범수 기자 bskim@hk.co.kr

■ 긴장완화 해법 어떤 게 있나

서해의 남북간 군사적 대치는 현재로선 군사분계 재설정보다는 남북공동어로수역 설정 등 우회적 방식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05년 수산협력실무회의에서 남북이 공동어로 원칙에 합의한데다, 비록 이견은 있지만 이후 군사회담에서 수역 설정 문제를 계속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지난해 3월과 5월에 열린 제3ㆍ4차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평화 정착에 기여하면서도 남북 어민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역에 남북공동어로수역과 바다목장 시범사업을 조성하자”고 제의했다. 물론 북측이 현재의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국방부 당국자는 “현재의 NLL을 기준으로 남북 같은 면적을 포함하는 수역을 계속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측이 NLL 문제를 먼저 논의한 뒤 공동어로수역을 협의하자며 남측 제의를 거부해 협의는 무산됐다. 하지만 북측이 올해 7월 군사실무회담과 제6차 장성급 회담에서 NLL 이남에 공동어로수역 5곳을 설정하자는 안을 제시해 협상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북측은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 해상에서 NLL에 접한 3개 지점, 백령도 동서 해안 2개 지점의 좌표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의 어로수역은 지난해부터 북측이 새로 주장하고 있는 서해 군사분계선과 맞물려 있어 사실상 NLL 무력화 시도로 해석된다.

해양수산부의 서해평화공원 구상도 눈여겨볼만 하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지난해 말 내놓은 ‘서해연안 해양평화공원 지정 및 관리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연평도 주변을 평화수역으로 설정하는 3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평화수역은 해양평화공원의 1단계 구역이면서 공동어로 시범해역이다.

이중 연평도 주변 해역 중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 일부와 NLL 북방 일부 구역(남북 각 20㎢, 총 40㎢)을 평화수역으로 정하는 방안은 수역 내 연평도 북쪽 미력리도(현재 북측 섬)를 공동기지로 활용할 수 있어 실효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또 실제 남북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고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피해가 가장 심각한 지역이어서 상징성도 높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부총장은 최근 열린 북한법연구회 월례 발표회에서 “남북은 잠정적으로 평화통일 시점까지 서해5도 주변의 3해리를 연안수역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수역을 ‘꽃게잡이 공동어로수역’으로 지정하는 경제협력 차원의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NLL 남북대치史

북한군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연평도와 백령도 인근에서 10여 차례 남한 어선을 납치했다. 하지만 당기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북방한계선(NLL)을 문제 삼진 않았다.

북한이 정면으로 NLL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73년 10월부터 11월까지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 근해를 43차례 월선한 이른바 ‘서해 사태’ 이후이다. 서해 사태 직후 열린 제346ㆍ347차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북한은 처음으로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이북 지역이 자신들의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서해 5개 도서에 출입하는 남측 선박이 사전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국방부는 이때 북한이 정전 이후 처음으로 NLL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국가적인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북한군은 경비정은 물론, 75년 북한 미그 21기 등으로 백령도 상공을 침범하는 등 끊임없이 NLL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어 77년 7월에는 ‘200해리 경제수역’을 설정한 데 이어 한 달 뒤에는 “동해에서는 영해 기선으로부터 50마일, 서해에서는 경제수역 경계선으로 한다”며 해상 군사경계선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논란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불가침 부속합의서 채택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1999년 6월15일 연평해전을 계기로 불씨가 되살아났다. 휴전 이후 남북 해군간 첫 교전으로 기록된 연평해전에서 북측 어뢰정 1척과 중형 경비정 1척이 침몰했고, 남측도 고속정과 초계함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7명이 부상했다.

2002년 6월29일 서해교전은 북한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다 NLL을 넘어온 북측 경비정을 남측 고속정이 막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선제 포격을 가한 북측 경비정은 남측 고속정과 초계함의 반격으로 화염에 휩싸여 20여분에 물러났다. 이 교전으로 남측은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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