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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풀벌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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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풀벌레 소리

입력
2007.08.2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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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대신 우기라고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불순했던 날씨가 전형적인 8월 하순의 패턴을 찾았다. 그제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를 지나니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하지만 한낮은 여전히 찌는 듯 무덥다. 사람들은 늦더위에 짜증을 내지만 들과 산의 곡식, 과수는 불볕에 부지런히 속살을 찌우고 있다. 그들에게 이 더위와 뜨거운 햇볕은 풍성한 가을 결실의 원천이다. 아무리 덥고 짜증 나더라도 풍요로운 가을을 기대하며 인내하고 자신의 알찬 가을을 함께 준비할 일이다.

▦ 그래도 정 참기 어렵겠거든 밤 이슥해 가까운 공원이나 산책길로 나가 보자. 대지에 가득한 풀벌레 소리는 벌써 가을이다. 시인 김광균은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추일서정)라고 노래했지만, 홍윤숙은 그 소리가 낭자하다고 했다.

<공원의 작은 숲에선 쏟아지는 여름 풀벌레 소리 낭자하다 아무리 들어도 결코 음악이 될 수 없는 노래 다만 제멋에 겨워 소리소리 지르는 소리가 눈치 보지 마라 주눅들지 그저 살아라 악을 쓰며 울어댄다> (풀벌레 소리). 홍 시인은 저 아름다운 미물의 소리에 마음의 위로를 받는단다.

▦ 귀뚜르르르 귀뚜라미 소리 구슬프고 아름답다. 고향 떠난 옛 사람들은 고향의 귀뚜라미 가져다가 머리맡에 놓아두고 향수를 달랬다. 사람들은 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애절하다고 하지만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연가일 뿐이다.

베짱베짱 밤새 배를 짜는 베짱이, 쩝쩝 찌이익 찌익 우는 여치, 초롱초롱초롱 쉼 없이 짝을 찾는 긴꼬리, 리~링 리~링 방울 굴리듯 아름답게 우는 방울벌레 등 풀섶의 제멋대로 관현악단의 멤버를 일일이 주어 섬기기도 힘들다.

깜깜한 밤중에 풀섶에서 녀석들을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엊그제 퇴근 길에 운 좋게도 긴꼬리를 봤다. 아파트 입구 무궁화 나무 잎사귀에 숨어 날개를 비비는 소리로 애타게 짝을 찾고 있었다.

▦ 풀벌레들은 낮에도 노래하지만 밤중에 훨씬 더 잘 들리는 것은 기온의 변화에 비밀이 있다. 낮에는 태양의 복사열로 지면 주위 공기가 따뜻해지면서 소리가 공중으로 퍼져 잘 들리지 않는다.

반면 일교차가 큰 요즘 밤에는 지면이 빨리 식어 소리들이 흩어지지 않고 우리 귀에 또렷이 들어 온다. 꽃 향기가 낮보다는 밤에 더 진하게 맡아지는 원리와도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풀벌레 소리에 취하고 이슬에 젖다가 별빛 달빛에 길을 찾아 집에 돌아오면 일상에 지친 심신에 어느덧 힘이 생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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