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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우리는 언제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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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우리는 언제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됐을까

입력
2007.08.2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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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슈미드 지음ㆍ정여울 옮김 / 휴머니스트ㆍ756쪽ㆍ2만8,000원

지난 4월 미국 사상 최악의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범인이 한국계 조승희로 밝혀졌을 때 우리는 경악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언론, 국민은 대부분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미국이 조승희 개인 차원의 문제일 뿐이라고 했음에도 우리는 거듭 사죄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느꼈다. 그는 어릴 때 이민 가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그를 여전히 같은 핏줄로 여겨 강한 일체감을 느꼈던 것이다. 유달리 강한 우리의 민족의식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민족의식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를 연대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청산하면서 ‘독립’한 1895년부터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고 애썼던 10여년간이 민족의식이 태동한 결정적인 시기였다.

민족을 단위로 하는 국가, 즉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의 탄생은 근대 초기 전 세계적 패러다임이었다. 총체적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한 한국인들도 ‘민족’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았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지식인과 개혁가, 정치평론가 등 전혀 다른 성격의 집단들 사이에서 민족을 최고의 당면과제로 삼는 지적 흐름이 나타났다.” 당시 대중매체로 자리잡은 신문에는 민족에 관한 지식인들의 담론과 저술이 봇물을 이루었다. 광개토대왕비, 간도 문제 등은 이 때부터 지식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1905년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어휘가 별로 쓰여지지 않았다. 당시 가장 오래 발간된 ‘황성신문’ 1900년 1월12일자에서 ‘민족’이란 어휘가 사용됐다. 그러나 이때 민족은 ‘동아시아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몇 년 후 민족이란 개념은 현저하게 바뀌어 1907년 6월 ‘황성신문’은 ‘민족주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민족은 나라(國)를 기초로 한다고 했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신채호는 민족에 대한 국가중심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종족적인(ethnic) 정의를 채택했다. 신채호가 연재물로 기획해 실은 ‘독사신론’은 민족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역사적 서술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한반도에서 ‘민족’ 개념의 등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민족의 혈통을 핵심주제로 역사를 서술, 왕실중심의 유교적 사관과 거리를 둠으로써 한민족의 역사를 중국과 무관하게 만들었고, 민족의 독자적인 행동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민족을 자주적인 주체로 ‘창조’했다. 그는 과거의 중화주의에서 탈피하고 현재의 일본에서 저항할 수 있는 민족 개념을 제공했으며, 이는 다른 역사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신채호의 견해와는 달리 민족은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며, 다른 인간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기초로 쓰여졌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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