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환기하는 힘은 홍차와 마들렌 과자에만 있지 않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다과향에 몸을 싣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섰다면, 이 화가는 원색의 산동네 풍경으로 아련한 동심의 추억을 뒤흔든다. 도타운 기억의 각질을 벗기고 일어서는 유년의 그 추억은 힘이 세다.
재일작가 박향숙(39)씨의 개인전 ‘일기 속의 풍경’이 서울 관훈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고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다마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2005년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가 한국에서 두 번째 갖는 개인전이다.
다마 미대는 요즘 국내 미술경매를 들었다 놨다 하는 국제 미술계의 거장 이우환 화백이 지난해까지 교수로 있던 곳. 이우환의 제자로 10여년을 지낸 작가는 “외국에서 공부했으면 그 나라에서 활동하고 인정 받아야 한다”는 스승의 말에 자극 받아 학위과정을 마치고도 일본에 남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박향숙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파울 클레와 파블로 피카소다. 이름 하여 오롯한 어린아이의 세계. 언뜻 보면 아동화 같은 인상을 주는 그의 커다란 화폭 위엔 집, 교회, 물고기, 나무, 새 등이 원근법과 명암의 원리를 내팽개친 채 강렬한 원색 속에 난만하게 뒹굴고 있다.
“피카소는 ‘최종적으로 어린 아이처럼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게 가장 힘들다’고 말하곤 했죠. 그의 말처럼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선과 면으로 사물을 파악한다. 크기와 위치, 배열 같은 건 의식에 없다.
원근법과 상관 없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건 크게 그리는 아이들처럼 박향숙도 삼차원의 질서정연한 세계를 평면의 행복한 카오스로 번역한다.
하지만 어른이, 그것도 고도의 미술교육을 받은 성인이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엔 너무 막막했죠. 배운 모든 것을 털어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추상적이고 어두운 그림을 그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과 평화, 여유를 발견했습니다. 어릴 적 다니던 돈암동 산동네의 공터, 기와집, 돌담길, 계단, 빨랫줄, 교회, 벤치…, 이게 내 그림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그는 좋아하는 이미지들이 의식 속에서 걸러질까봐, 문득 떠오른 이미지가 이내 사라질까봐, 밑그림 없이 캔버스에 직접 작업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박향숙을 대표하는 아동화풍의 소박하고 따스한 그림과 함께 최근작 비눗방울 시리즈까지 25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다음달 4일까지. (02)739-4937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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