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름 펴니 인생 폈어요"
40세 이상 중ㆍ고령자들의 외모 가꾸기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 '품위형'에서 '생계형'으로 바뀌는 경향이 뚜렷하다. 젊고 건강하게 보이려는 개인적인 웰빙 차원을 넘어 이제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욱 크게 들린다.
심한 주름 등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는 구직자는 '자기 관리에 소홀하고 대인관계에서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줘 재취업에 불리한 게 현실이다. 중ㆍ고령 구직자들을 위한 일자리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생계형 외모 가꾸기 열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재취업 외모 관리 열풍은 피부과와 성형외과에서 실감할 수 있다. 주름과 흉터 제거, 쌍꺼풀 수술 등을 통해 멋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중ㆍ고령 구직자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10여년간 운영하던 화장품 제조업체를 접고 재취업을 준비하던 이정신(49ㆍ가명)씨는 3월 성형외과에서 쌍꺼풀을 만들고 다크서클(눈 밑 지방)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항상 형으로 불렸다"는 그는 수술 뒤 인천의 화장품 제조업체 임원으로 취직하는데 성공했다. 이씨는 "수술 뒤 젊어졌다고 생각하니 면접장에서 더욱 자신감 있게 나를 소개할 수 있었다"며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벌써 3명이 수술을 받았는데 다들 만족해 한다"며 활짝 웃었다.
1990년 결혼해 전업주부로 지내던 장하영(42ㆍ여)씨는 1월 성형외과에서 쌍꺼풀을 만들고 입가 팔자 주름을 없앴다. 직장 구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날카롭고 강해 보이는 얼굴 인상을 바꾸기 위한 시도였다. 결과는 대성공. 수술 한 달 뒤 그는 정수기 업체 영업직원으로 입사했다. 장씨는 "인상이 바뀌니 인생도 확 바뀌었다"며 "결혼 17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직장 생활이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피부전문 클리닉 CNP 차앤박 피부과의 박연호 원장은 "50대 이상 분들의 수술 예약률이 지난해에 비해 30% 늘었다"며 "주름 기미 검버섯 제거 등 재취업을 염두에 둔 치료와 수술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가발도 제2인생 찾기의 든든한 나침반이 됐다. 가발은 그 동안 쓰면 답답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여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다지 각광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기술의 발달로 진짜 머리카락과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첨단 가발이 나오면서 '대머리 구직자'들의 재취업 성공 필수품 1호가 됐다.
박경선(54ㆍ가명)씨는 2005년 말 중령으로 제대한 뒤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대머리다. 군에서는 항상 모자를 쓰기 때문에 대머리를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선 불가능했다. '할아버지 처럼 보이는 얼굴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사람 만나기도 꺼려졌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다.
박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가발을 쓰면서 머리에서 빛이 사라지니 내 인생이 빛 나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항상 할아버지로 불리던 그는 가발을 쓰면서 '아저씨'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덩달아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고 자신감도 되찾았다.
가발을 쓰기 전엔 대인 기피증까지 의심할 정도로 사람 만나기를 싫어했던 그는 올 봄 인성교육 지도사 자격증을 딴 뒤 교도소 기업체 등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로 인성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씨는 "처음엔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가발을 쓰길 잘 한 것 같다. 요즘은 사람 만나는 게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최원프리모가발의 최원희 대표는 "재취업을 위해 젊게 보이려고 가발을 맞추러 오는 고객이 한 달에 10명 정도"라며 "이유를 말하지 않는 고객까지 합치면 20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ㆍ고령 구직자들의 외모 가꾸기 열풍은 젊은 여자들의 사랑방인 피부 관리실도 '접수'하고 있다.
지난해 공기업에서 퇴직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박영춘(55ㆍ가명)씨는 두 달 전부터 서울 구로동에 있는 한 피부 관리실의 회원이다. 기업 임원인 친구와 함께 다닌다는 그는 "요즘은 얼굴 쭈글쭈글한 사람은 경비도 하기 어렵다"며 "여자들이 많아서 멋쩍긴 해도 이렇게라도 해서 취직만 된다면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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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운전하는데 외모가 무슨 상관인지…"
강신춘(46ㆍ대구 북구)씨는 ‘머리카락 없는 자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강씨는 4년 전에 차린 식당이 망하는 바람에 운전 분야 일자리를 알아 봤지만 쉽지 않았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 탓이 컸다. 대형 음식점 주차 요원에도 지원했지만 “젊은 사람들한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강씨는 고민 끝에 3월 가발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 “신기하게도” 곧바로 대구 시내 한 호텔의 주차 요원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는 “가발을 맞춘 뒤 젊어 보여서인지 곧바로 직장을 얻은 건 좋았지만, 운전하는데 도대체 외모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중ㆍ고령 구직자들의 외모 관리 열풍 만큼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취업 시장에서의 외모 중시 풍조를 더욱 부채질 할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취업을 준비하는 일부 젊은이들만의 고민으로 여겨져 온 외모 콤플렉스가 고령 구직자들에게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이 매우 씁쓸하다”며 “외모 가꾸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만큼 돈 없는 사람은 결국 재취업도 못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취업에 실패하는 모든 원인을 외모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며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보는 부분은 구직자의 ‘인물’이 아니라 ‘인상’”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취업 전문가는 “경력이나 사람의 됨됨이 보다 외모가 더 중시되는 것은 분명 잘못됐지만, 재취업을 위해 자기 관리에 힘쓰는 구직자들까지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직(轉職)지원 서비스업체 제이엠커리어의 최나영 책임컨설턴트는 “면접 때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진지한 태도만 보여줘도 충분히 인사 담당자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외모가 중요하다고 해서 결코 취업 성패의 결정적 요인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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