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이탈리아의 예스러움을 상징한다면, 밀라노는 이 나라의 모더니티를 대표한다. 물론 이런 단언은 충분히 경솔하다.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은 것이다. 19세기 후엽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된 이래 한 세기 반 동안 반도의 정치적 중심지 노릇을 하면서, 로마는 넉넉한 모더니티를 획득했다. 로마는 한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 현대적이다.
마찬가지로 밀라노는 한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 예스럽다. 밀라노가 유럽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가장 낮추어 잡아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이 도시에서 만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로 합의한 서기 313년이다. 이것이 소위 밀라노칙령이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서부 영역을 다스렸고, 그의 매부인 리키니우스는 동부를 다스렸다. 그 뒤 밀라노는 여러 차례 주인을 바꿔가며 유럽문화사의 한 거점 노릇을 했고, 그 역사의 흔적은 시내 여기저기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로마의 모더니티는 고대 로마제국과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의 배경 속에 드문드문 박혀 있다. 마찬가지로 밀라노의 예스러움 역시 아르마니, 프라다, 베르사체, 세르지오 로시 따위의 명품 브랜드로 상징되는 모더니티의 허영 위에 드문드문 아로새겨져 있다.
한 나라의 수도이고 위치도 반도의 중서부지만, 로마에선 설핏 남부의 가난 냄새가 난다. 반면에 밀라노는 흘끗 보아도 부자 도시다. 밀라노는 단지 이탈리아의 ‘잘 사는 북부’만을 대표하는 게 아니다. 이 도시와 그 둘레는 유럽연합 안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밀라노의 지하철 산바빌라 역이나 몬테나폴레오네 역에서 내려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와 스피냐 거리를 걷는 로마 토박이는 일순 기가 죽을 수도 있다. 그 거리의 상점들이 뽐내고 있는 온갖 브랜드들이 밀라노가 세계 상류계급의 수도라는 걸 일깨워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로마 토박이가 속 깊은 사람이라면, 이 거리의 쇼윈도들이 결국 천박한 허영의 전시장이라는 걸 깨닫고 이내 안도할 수도 있을 게다.
■ 몬테나폴레오네·갈레리아… 아내와 함께 ‘허영여행’
아무튼 로마는 한 때 세계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수도일 뿐이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수도는 밀라노다. 1990년대 이후 이탈리아 정치를 한 손에 쥐고 흔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고향이 바로 밀라노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힘은 오로지 그의 경제적 힘에서, 밀라노의 힘에서 나왔다. 베를루스코니가 정계를 쥐락펴락하던 시절, 로마는 밀라노의 위성도시 같기도 했다. 내가 밀라노에 간 것은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하기 전이었지만, 그 때 이미 유럽 언론은 이탈리아를 ‘베를루스코니 공화국’이라 부르곤 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이탈리아가 밀라노 공화국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건설업에서 유통업을 거쳐 금융에 이르기까지 베를루스코니는 손을 안 뻗친 곳이 없지만, 이 이탈리아 최고 부호를 정치적 거물로 만들 밑절미를 마련한 것은 주로 그의 미디어 지배였다.
내가 밀라노를 찾던 시점에 이탈리아 영화계는 베를루스코니가 대주주인 펜타필름이 지배하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또 세 개의 전국 텔레비전 채널과 주요 신문들, 출판사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이 AC밀란 구단주가 1994년 처음 집권했을 때, ‘미디어크라시’(미디어를 통한 지배)는 이탈리아의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전국 텔레비전 채널 일곱 개 가운데, 민영 텔레비전 하나를 빼고 나머지 여섯 개(공영 채널 셋에다가 그가 본디 소유하고 있던 민영 채널 셋)가 그의 통제 아래 들어간 것이다. 온갖 스캔들 끝에 권좌에서 물러난 지금도 베를루스코니는 여전히 이탈리아 미디어의 큰손이다.
영화와 텔레비전을 넘나들며 연출자로, 배우로, 진행자로 이름을 얻고 있던 마우리치오 니케티는 내게 그런 상황이 필요악이라고 주장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아니었으면 이탈리아 미디어는 국가가 독점하고 있을 겁니다. 과점이 독점보다는 낫지 않은가요? 게다가 이탈리아 영화는 텔레비전에 크게 기대고 있어요. 텔레비전 시장이 없다면, 이탈리아 영화는 미국 영화와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니케티가 동향(同鄕)의 사업가에게 호의를 지닌 것은 또렷했다. 하기야 그가 펜타필름에서 영화를 여럿 만들었으니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없었을 게다.
그는 분명히 선거 때마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포르차 이탈리아’에 표를 찍었을 게다. 니케티는 내게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해 투덜댔는데, 집권 이후 베를루스코니가 친미 유럽의 선봉에 섰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밀라노가 허영의 전시장인 만큼, 아내와 나는 허영의 소비자가 되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가난했으니 그 소비는 시선의 소비, 상상력의 소비에 그칠 峙謗?없었다. 우리의 허영여행은 지구 패션 1번지라는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서 시작됐다. 아내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비겁한 것 같긴 하다) 우리는 그 허영의 거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 이전에든 그 이후에든, 그 거리를 촘촘히 수놓은 브랜드 제품을 지닐 기회가 아내에게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아리다. 여느 여자들처럼 아내도 먹는 것보다 입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더 그렇다. 비록 젊음은 사라졌으나, 그녀에게 세월은 꽤 남아있을 테니, 언젠가 그 허영을 유물론적으로 실천할 수도 있을 게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알레산드로 만초니 거리를 따라 스칼라 광장에 이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상이 보였다. 레오나르도의 고향은 피렌체 근처의 빈치지만, 밀라노는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전기 작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생애를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한다.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499~1506),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그리고 로마ㆍ앙부아즈 시대(1513~1519)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밀라노는 이 르네상스적 완전인(完全人)의 생애 두 시기를 품었던 도시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최후의 만찬> 이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고, 그의 탄생 500주년을 맞은 1950년대 초 그 성당 한 블록 건너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립 과학기술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최후의 만찬> 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첫 번째 밀라노 시대에 그려졌다. 최후의> 최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상 건너편엔 스칼라 극장(라 스칼라)이 서 있다. 본디 건물은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 때인 18세기 후반에 세워졌지만(당시 밀라노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 지금 보는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공습으로 파괴된 것을 전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극장 무대에 처음 오른 작품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에우로파 리코노슈타> (‘정체가 드러난 에우로파’)다. 에우로파>
베르디의 <오텔로> 와 푸치니의 <나비부인> 을 비롯해 음악사의 전면을 장식하는 오페라의 상당수가 라 스칼라에서 초연됐고, 지금도 이 극장은 성악가들과 성악가 지망생들에게 꿈의 무대다. 라 스칼라는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을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 원칙으로 유명하다. 거기엔 신분에 따른 예외가 없다. 막이 오른 직후 극장에 도착한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이 입장을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나비부인> 오텔로>
■ ‘오페라의 메카’ 라 스칼라 근처 밀라노 대성당 위용
스칼라 극장이 들어서 있는 스칼라 광장과 밀라노 대성당(두오모)이 들어서 있는 두오모 광장 사이의 더블 아케이드가 세계 최초의 근대적 쇼핑몰이라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갈레리아다. 갈레리아에 들어서자 아내의 걸음걸이가 느려졌고, 그녀의 눈이 다시 빛났다.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에서처럼 말이다.
시간의 원근법을 무시하고 보면 심상한 건축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 쇼핑몰이 1860년대에 들어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현대적 허우대가 정녕 놀랍다.
통일 이탈리아는 그 첫 군주의 이름을 딴 쇼핑몰에 최첨단의 모더니티를 부여함으로써, 강대국들의 원심력에 갈갈이 찢긴 굴욕의 과거와 결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갈레리아의 명성 덕에, 쇼핑몰에다 갈레리아(갤러리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관행은 이탈리아 바깥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제 나라가 가톨릭의 맏딸이라고 으스대는 프랑스 신자들의 말이 옳다면, 이탈리아는 가톨릭 그 자체다. 이탈리아 역사가 곧 가톨릭교회의 역사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성당들의 규모에서도 그렇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야 가톨릭의 본산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밀라노 대성당의 규모도 처음 보는 이를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첨탑들은 하도 많아 세기도 어려웠다.
1960년대 들어서야 완공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미완성인 이 성당 건물이 처음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다. 그 자리엔 11세기까지 다른 모양의 성당이 들어서 있었다. 화재로 소실된 이 성당을 다른 형태로 재건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700년이 넘은 것이다. ‘만만디’나 ‘우공이산’은 우직한 중국인들만의 지혜가 아니었다.
짧은 겨울해가 어느덧 기웃했다. 아내와 나는 가장 우아한 허영을, <최후의 만찬> 앞에서 짐짓 감탄하는 허영을 다음날로 미루기로 했다. 최후의>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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