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사의 최대 라이벌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이 1950년대 중반 제3차 국공(國共)합작을 통해 서로 도왔다고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의 중문판 사이트 환구재선(環球在線)이 21일 보도했다. 두 사람은 49년 중국 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 직접 대면은 하지 못했지만 접촉을 계속하면서 합작 관계까지 가졌다는 것이다.
환구재선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중국 공산당의 대만 점령 가능성과 태평양 지역의 안전을 들어 대만해협에 7함대를 파견하면서 종전의 ‘대만지위 미확정론’을 포기했다.
장제스는 당시 대만 군사력으론 공산당 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7함대의 장기 주둔을 받아 들였지만 곧 미국의 ‘대만지위 미확정론’ 폐기가 대만을 중국에서 분리, ‘두 개의 중국’을 만들려는 움직임이란 사실을 알고 7함대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장제스는 예궁차오(葉公超) 외교부장을 통해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며 미국의 대만 방위계획이 이런 사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대륙으로 돌아가겠다(大陸返攻)던 장제스로선 당연한 자세였다.
마오쩌둥은 성명을 접한 뒤 “장제스는 양심을 갖고 있다”며 “그가 대만 총통으로 있는 게 좋다”고 평가했다.
그런 가운데 돌연 국민당 내부에서 총통을 민주 선거로 뽑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환구재선은 거기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장제스를 ‘두 개의 중국’ 전략의 걸림돌로 판단, 그를 실각시키고 친미 성향의 다른 인사를 총통으로 내세우려 했다.
구체적으로 행정원장과 부총통을 역임한 천청(陳誠)과 작가 후스(胡適)의 이름까지 거론됐다. 후스의 경우 정치 경력이 전무,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자 미국은 천청을 장제스에 맞설 후보로 결정했다고 환구재선은 보도했다.
장제스는 미국의 속셈을 간파하고 표면상으론 민주 경선에 동의했으나 내심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작전에 착수했는데 여기에 마오쩌둥이 힘을 보탰다. ‘하나의 중국’을 보전하기 위해 장제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마오쩌둥은 외국 손님을 만날 때마다 그가 총통 자리에 있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고 이런 발언은 효과를 발휘해 장제스는 경선에서 승리했다.
국공합작 시대에 장제스의 부하로 일한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사람을 넣어 공산당측의 의중을 전했다. 그간의 경위를 알게 된 장제스는 조기에 공산당측과 대화창구를 열기로 결심했다.
양측은 차오주런(曹聚仁)이란 문화계 인사를 중재자로 찾아냈는데 그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 양측의 신망이 두터웠다.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두 차례 차오주런을 공산당과의 거중 조정을 부탁했다. 차오주런은 56년 7월 베이징을 극비 방문, 저우언라이에게 장제스의 뜻을 전했고 제3차 국공합작 방침을 확약받았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3차 국공합작의 목적은 조국통일의 실현을 전제로 하지만 대만의 정권 통일을 우선하는 것”이라며 장제스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혔다. 마오쩌둥도 그 해 10월 차오주런을 접견하고 중국 현대사에서 장제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적당한 시기에 대만을 방문하겠다는 밀약까지 했다고 환구재선은 소개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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