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에서 국내 최초로 ‘히트파이프’를 개발하던 당시 송규섭 연구원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2년간 공동연구를 진행했던 민간업체가 연구를 포기하고 미국으로부터 해당 기술을 수입키로 한 것이었다. 첨단 냉각기술을 국산화 하겠다는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컴퓨터(PC) 휴대폰 등 전자제품의 성능이 높아지면 대두되는 발열량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는 첨단 냉각장치 시장을 해외에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었다. 송 연구원은 생각 끝에 뜻이 맞는 연구원 2명과 함께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 현재 냉각장치를 비롯해 가열 및 집열 등 국내 열(Thermal) 솔루션 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에이팩(APACK)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히트파이프란 열 전도율이 높은 구리, 티타늄 등의 합금으로 특수 제작한 진공 파이프에 증류수나 알코올 등을 넣은 열 전도체를 말한다.
파이프 안의 액체가 기화할 때 주변 열을 뺏어가는 원리를 이용해 PC나 통신중계기 등 각종 기기에서 발생하는 열을 빠르게 냉각시킨다. 실제 구리보다 열 전도율이 500~1,000배나 높다.
냉각 팬에 의한 강제 공기냉각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 배출 효율이 높아 PC와 통신중계기뿐 아니라 광학기기, 디스플레이, 에어컨 등으로 사용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송 대표는 창투사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 ETRI 연구원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해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많은 벤처 업체들이 그랬듯, 초기에 시장 현실을 무시하고 앞선 기술에만 기댔던 에이팩은 쓰라린 좌절을 겪어야 했다. 기대했던 PC 냉각장치 시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아 적자를 계속하다 결국 2003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60여명의 직원 중 11명을 희망퇴직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며, 직원 임금을 동결하고 임원 임금은 삭감했다. 송 대표는 “차라리 내 살을 베어내고 싶었다”는 말로 당시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했다.
에이팩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도 연구개발비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004년 2월 삼성전자 데스크톱 PC 쿨러를 개발해 납품한 것을 계기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에이팩은 그 해부터 흑자로 전환, 2005년 매출 100억원, 2006년에는 150억원을 돌파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PC업체 간에 열이 많이 발생하는 고성능 중앙처리장치(CPU) 경쟁이 가속화 하면서 에이팩은 ‘날개’를 달았다. PC, LCD TV 등 정보통신(IT) 분야에서 슬림형 제품이 시장을 주도하자 기존의 원형 대신 평면형으로 개선한 제품을 개발해 기업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또 기존제품보다 냉각효율은 두 배 이상 뛰어나면서 소음은 획기적으로 개선한 CPU 냉각장치 ‘제로썸’을 개발하는 등 대만 일본의 경쟁사보다 성능은 뛰어나면서 가격은 저렴한 제품을 속속 선보였다. 에이팩은 발열이 많은 소형 휴대기기용 냉각기 시장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삼성전자가 개발하고 KT가 서비스하는 휴대인터넷(와이브로) 단말기의 냉각장치도 에이팩이 개발한 것이다. 향후에는 에이팩이 개발한 2㎜ 두께의 초박형 냉각장치가 휴대폰이나 고성능 개인정보단말기(PDA) 등에 적용될 예정이다.
2005년에는 기존 냉각장치에서 가열 및 집열장치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프린터 히팅롤러가 대표적인 가열장치다. 프린터의 핵심부품인 히팅롤러는 레이저 프린터에서 인쇄할 때 고온의 열을 가해 토너가루를 인쇄용지에 압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에이팩은 삼성전자와 공동으로 새로운 형태의 히팅롤러(E-coil)를 개발해 양산 중이다.
이 제품은 인쇄 명령 후 첫 장이 인쇄되는 시간을 42초에서 16초로 대폭 줄였으며, 섭씨 15도까지 차이가 나던 표면온도 차이를 3도 안으로 줄였다.
집열장치 역시 에이팩의 중요한 미래 먹거리 중 하나다.
에이팩은 히트파이프를 이용한 유리 진공관 태양열 집열기 시스템을 개발해 공급하고 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과 공동으로 개발한 이 시스템은 진공관과 히트파이프가 없는 기존 태양열 집열기에 비해 열손실과 설치 면적을 크게 줄였다.
에이팩은 검증 받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해외에서는 아직 부족한 브랜드 파워를 보강하기 위해 지난해 인텔로부터 300만 달러 규모의 투자유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미국 일본 유럽 등을 돌며 현지 유통을 담당할 바이어 발굴에 힘써 현재 전세계 20여개의 글로벌 영업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2003년 9만7,000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이 지난해 364만 달러로 30배 이상 늘어났다. 올해 상반기에만 335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에이팩의 이 같은 성공은 송 대표의 뚝심에서 비롯된 바 크다. ETRI에서만 10년 이상 열 전달 분야를 연구한 송 대표는 창업 이후에도 ‘열’ 분야에만 매달려 설립 8년 만에 에이팩을 대덕연구단지의 대표 벤처기업으로 만들었다. 에이팩은 내년에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대전=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 연구원 출신, 송규섭 대표/ "독립운동 한다는 생각으로 기술 국산화 100% 이룰 것"
2006년 7월 초 에이팩 임직원 10여명은 의미가 남다른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다. 송규섭(50ㆍ사진) 대표가 2001년 “회사 매출이 100억원을 돌파하면 백두산을 다녀오자”고 한 약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당시 10억원 수준에 머물렀던 매출이 4년이 지난 2005년에 11배가 증가한 113억원에 이른 것이다. 축하할 일은 분명한 일이지만 왜 하필이면 백두산이었을까?
회사 대표 전화번호와 송 대표의 휴대폰 번호를 알게 되면 이 궁금증이 더욱 커진다.
끝 번호가 모두 815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에이팩의 정체성이 ‘기업이 아니라 통일단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 배경을 묻자 송 대표는 “우리도 독립 운동하니까요. 패키징 기술의 100% 국산화가 우리 회사의 목표에요”라고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송 대표의 휴대폰 배경화면에는 ‘패키징 기술의 독립’이라고 쓰여 있었다. ETRI연구원 출신인 다른 창업자 두 명 모두 휴대폰에 같은 말이 적혀 있다고 송 대표는 말했다.
패키징 기술이란 전자제품을 완성했을 때 발생하는 부정적인 부수 효과를 최소화하는 기술을 아우르는 전문용어다. 컴퓨터(PC)에서는 발열 문제를 최소화하는 냉각장치나 소음을 최소화하는 방음장치 등이 바로 패키징 기술에 해당한다.
송 대표는 “일반 사용자들은 패키징 기술이 중앙처리장치(CPU)나 메모리 기술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패키징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제품은 활용도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어 사실상 가장 핵심적인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패키징 기술에 대해 한창 연구할 당시 국내에는 패키징 기술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따라서 관련 기술은 모두 미국에서 수입했다. ‘패키징’이라는 용어도 송 대표가 ETRI에 연구원으로 있을 때 처음 국내에 도입한 것이다.
현재 에이팩이 생산하는 모든 냉각ㆍ가열ㆍ집열 장치의 기본이 되는 ‘히트파이프’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송 대표는 “우리가 국내 처음으로 생산한 히트파이프는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관련 특허를 가진 국가도 한국 일본 대만 미국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삼성전자와 LG전자, 현주컴퓨터 등 국내 업체들도 자사의 PC나 프린터에 에이팩의 제품을 부착할 정도로 국산화가 상당히 진척됐다.
송 대표는 “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패키징 기술의 독립을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이제 우리 기술의 세계화가 또 다른 과제”라고 말했다.
매출규모가 안정을 찾은 지난해 송 대표가 세계를 누비며 영업네트워크를 쌓고,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해 인텔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은 것도 모두 세계화 전략에 따른 것이다.
송 대표는 “조만간 예정된 코스닥 등록 역시 세계화 전략의 토대”라며 “향후 패키징 기술 분야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을 세계인의 가슴에 새기겠다”고 밝혔다.
대전= 문준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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