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한국 문학의 특징을 포착하고 전망할 수 있는 키워드는 뭘까. 2002~2006년에 등단한 20, 30대 젊은 평론가 8명이 저마다의 화두를 계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제시했다. 특집 ‘2000년대 문학의 키워드 - 젊은 비평가의 시선’에 실린 이들의 글을 요약했다. 문학과사회>
▲ 탈(脫) 유토피아주의 - 문화, 이념의 빈자리를 채우는‘근사한 꿈’ 이 될까 / 강계숙
유토피아주의는 근대성의 주요 특징으로, 정치 권력과 사회 제도의 변혁을 꾀하며 더 나은 세상을 기획하려는 이념이다. 하지만 이는 90년대 초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쇠락했고, 이념적 지표를 잃은 젊은이들은 사적 향유의 공간인 문화에서 출구를 찾았다.
이들 세대가 2000년대 한국문학의 새 중심축으로 떠오르면서 탈 유토피아주의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 미확정의 텅 빈 지표를 ‘근사한 꿈’으로 채우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과제다.
▲ 안티 이데아(anti idea) - 인간사를 이해하는 것이 부질없이 돼 버린… / 강유정
새로운 소설들엔 ‘현실’이 없다. 문학으로 현실에 없는 거짓 위안을 주는 일에 진력이 났다고 토로한다. 박형서, 김태용의 소설은 언어의 상징성을 박탈한다. 이들이 ‘문’이라고 썼다면 그것은 어떤 초월적 의미 없이 그저 ‘문’이다. 반복은 중요성을 드러낸다지만 김유진, 한유주 소설의 반복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21세기 소설가에게 사이버 공간은 허구적 가상이 아니라 제어 가능한 인공 낙원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인간사를 이해하려 드는 건 부질없다.
▲ 산주검(undead) - 현실-가상 구분은 뫼비우스 띠처럼 모호해졌다/ 복도훈
산주검은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비(非)존재다. 한국 문학의 어느 시점부터 산 자-죽은 자는 같은 곳에 거주하게 됐으며, 현실-가상, 일상-비상사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별이 불가능해졌다.
백민석의 장편 <목화밭 엽기전> 은 살인마 부부를 무기질의 인형과 야수적 원숭이로 비유하며 극단적 우울과 활력이 공존하는 사회심리적 현실을 그렸고, 편혜영은 소설집 <아오이가든> 에서 집요한 해부학적 묘사를 통해 정체성을 얻지 못한 존재를 박제로 기호화했다. 아오이가든> 목화밭>
▲ 깊이 - 시는 얇아졌고, 시인에겐 진리를 향한 의지가 없다 / 신형철
오늘날 씌어지는 어떤 시들은 얇다. 깊이가 없다. 시에서 깊이는 회화의 원근법처럼 ‘시적 소실점(消失點)’을 설정해야 생긴다. 신(神) 대신 근대적 주체인 ‘나’를 시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근대 서정시는 깊이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장욱, 김행숙, 하재연, 이근화 등은 시적 소실점을 없애거나 최소한으로 약화시킨다.
진리를 파악하겠다는 의지가 소멸된 이들의 시는 권태롭고 나른하다. 평평한 시가 얄팍한 시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다른 미학이 잠재해 있다.
▲ 무상성(無償性) - 문학은 증여… 독자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 이수형
문학의 노고는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 평론가 고(故) 김현은 이 질문을 틀어서 문학의 본질을 재정의했다. 즉 문학은 아무 대가도 받지 못하는(않는)데, 그 까닭은 문학이 독자에게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못하기(않기) 때문이다.
김현은 이처럼 문학이 유용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나아가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문학은 교환이 아닌 증여(선물)이며, 증여로 구축된 문학의 재생산 체계는 예상 외로 강하다.
▲ 팩션 -문학의 위기, 역사 속에 살 길이 있을까 / 정여울
역사소설 붐은 문학사에서 반복된 현상이지만 최근 김훈, 김탁환, 김별아 등이 주도하고 있는 팩션 열풍은 ‘문학의 위기’의 타개책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차이가 있다. 현재 팩션들은 별다른 책임감 없이 역사를 지나치게 변형하고, 동시대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에 기댄다는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기존의 영웅주의나 민족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독자와 다채로운 양상으로 소통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 니힐리즘 - 경쟁과 돈에 매몰된 시대… 문학은 허무주의로 대응 / 함돈균
‘경제 가치에 의한 삶의 전면적 식민화’로 규정할 만한 ‘97년 체제’ 하에서 우리 문학의 배후엔 니힐리즘(허무주의)이 어른거리고 있다.
경쟁에서 탈락한 박민규, 이기호의 백수들이나 전망을 상실한 김중혁의 아날로그적 상상력이 그렇고, 오늘날의 교환 체계 속에서 예술이 무가치해졌다고 자조하는 김언희, 김이듬의 시가 그렇다. 반면 황병승, 이장욱, 강정 등은 니힐리즘을 자기 긍정의 힘으로 변형시킨 시로써 폐허의 세계에 맞선 ‘1인 전쟁’을 수행한다.
▲ 즐거움 -그래도 웃는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건만 / 허윤진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 속 인물들은 고통을 숨긴 채 현실이 행복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김애란의 단편 <달려라, 아비> 의 주인공 ‘나’도 엄마가 씩씩해질 수 있도록 아버지의 부음을 지어낸 이야기로 대체한다. 달려라,> 달의>
정이현, 김미월 소설에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홀로 짊어지고 분노를 감추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즐거워요, 즐겁습니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 외침은 자기 내면의 변화를 숨기기 위한 반어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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