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마루에는 붙박이 책장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책장이 보였다. 막 이사를 온 우리 식구들은 마땅히 그곳에 꽂을 책이 없었다. 여성지 몇 권, 관광지에서 산 연필꽂이, 무늬가 선명하지 못한 꽃병…… 뭐 이런 것들이 책장의 빈 공간을 채웠다. 이사를 오고 몇 년이 지났지만 우리 식구들은 책장에 무엇을 더 꽂아야 할지 몰랐다.
그저 거기에 무엇인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 그건 아마도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그 시절 유행이었는지 어쨌는지, 암튼, 우리 동네에는 그런 붙박이 책장을 가진 집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서적 외판원이 왔다. 어머니들은 할부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과 세계위인전집과 어린이백과사전을 샀다. 이제야 비로소 책꽂이가 찼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소공녀 소공자 흉내를 내며 놀았다. 나는 빨리 읽고 싶은 마음과 이렇게 빨리 읽다가 나중에 읽을 게 없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 사이에서 늘 갈등을 했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읽은 책을 또 읽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과자봉지나 음료수 병에 적힌 글씨들을 읽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이 과자를 만들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딸기 맛을 낼 수 있는 것일까? 읽을 책이 없으면, 나는 혼자 상상을 하며 책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열다섯 살 때,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그때 붙박이 책장도 부서졌다. 책장을 가득 채웠던 책들을 골목에 내놨더니 누군가 집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동네의 다른 집들도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책장은 부서졌고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이 골목에 버려졌다. 버려진 책들을 볼 때마다, 책갈피 사이에서 아직 살고 있는 주인공들과 다시 재회를 했다. 내 안에 수십 명의 주인공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세상의 빈 공간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그 책을 읽던 꼬마들은 이제 다 서른이 넘어버렸다. 그 책을 끝으로 더 이상 책을 안 읽은 사람도 있고, 그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책을 읽은 사람도 있다. 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 시절, 책 이야기를 하던 우리들 가슴에는 별이 반짝였다.
윤성희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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