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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끔찍한 동심(童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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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끔찍한 동심(童心)

입력
2007.08.1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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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童心)의 세계’라는 말이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동심은 대개 무구함, 순수함, 깨끗함 따위와 이어진다. 이런 관념의 틀 안에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음에 때를 묻히는 것이다. ‘우리는 깨끗하게 태어났지만, 세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더럽혀진다; 선한 사람이란 어릴 때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 위선은 악을 제어하는 실천

그러나 조금만 돌이켜보면, 이런 어린이 찬가의 근거가 허술하다는 게 드러난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이들은 선함과 거리가 있다. 아이들은 대체로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드물지 않게 공격적이다.

놀이방이나 유치원 교사 노릇하기가 힘든 것은 동심이라는 게 일반적 관념과 달리 그리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실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선 아이들끼리의 폭력과 따돌림이 난무하고, 경쟁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음모가 횡행한다.

그런 현상이 큰 사회문제로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이들은 육체적 힘이나 지능이 충분치 않아 그런 폭력과 음모가 어마어마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른들보다 더 선해 보이지는 않는다.

외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서야 윤리적 자극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염치, 너그러움, 수치심, 배려, 협동심, 겸손, 예의 따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대개 교육을 통해서다.

물론 이런 미덕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것일 테다. ‘교육’에 해당하는 서양말의 어원은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이다. 본디부터 없었던 것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잠재적으로는 사람이 윤리를 지향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윤리성을 발현시키는 것은 교육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윤리적으로 자라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다. 동심은 흔히 비윤리적이다. 아이들은 선한 게 아니라 유치하다.

공동체가 교육을 통해 새 세대의 마음속에서 윤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공동체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세상살이의 한 본질적 측면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궁극적으론 늑대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선양할 경우 사회는 무뢰한들의 놀이터로 변해 궁극적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유전자가 본디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공동체가 개체들로 하여금 그 유전자들의 이기적 목적을 이타적 외양으로 이루도록 독려하는 것은 종(種)의 안녕에 크게 이롭다. 그것은 윤리 교육의 한 측면이 위선 교육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위선(僞善) 자체는 선이 아니지만, 그것은 위선(爲善)을 통해서, 곧 선의 형식적 실천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일정하게 악을 제어한다. 동심이란 아직 그 위선에 이르지 못한, 날것으로 이기적인 마음이다.

선한 사람으로 그득한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겠지만, 그것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그만저만한 윤리적 굴레로 이기심을 조이며 선을 겉치레로라도 실천하는 사람들(곧 위선자들)이 세상에 넘쳐나는 것 정도일 테다.

넘쳐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윤리를 의식하는 위선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은 지옥은 아니다. 실제로 인류 문명의 역사는 상당 부분 위선의 역사였다. 위선자들이 우리를 다스렸다.

■ 아이들이 다스리는 세상

새 천년 들어 상황은 한결 나빠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약한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은 미국 행정부의 이지메에는 위선조차 없다. 그저 날것 그대로의 동심만이 펄럭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도 대개 그렇다. 그들은 부끄러움의 능력마저 완전히 잃은 듯, 유치하고 사악한 동심만을 내보이고 있다. 위선자들이 다스리는 세상도 그리 좋은 세상은 아닐 게다. 그러나 정말 끔찍한 세상은 아이들이 다스리는 세상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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