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넘은 노인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다만 조국 광복에 청춘을 바친 젊은 시절의 명예를 찾고 싶을 뿐이지요.”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가 펴낸 ‘고등외사월보(高等外事月報)’를 넘기던 김학길(83ㆍ서울 마포구 중동)씨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다. 일제의 입장에서 볼 때 사상범죄자, 즉 항일투사들의 사건 기록을 남긴 책이다.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엔 김씨 자신을 비롯해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의 이름이 한자로 선명히 적혀 있었다.
김씨는 전북 전주사범학교 3학년 때인 1942년 6월 항일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우리회’를 결성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듬해 만주로 망명했다.
지린성(吉林省)에서 일본어 강습소 강사로 위장 취업해 교민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며 청년들에게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설득했다. 김씨는 45년 1월 국내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고향인 충남 부여의 집에서 붙잡혔다.
그러나 조국 해방을 위해 힘쓴 노력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인정도 못 받고 있다. 87년부터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보훈 신청을 다섯 번 신청했지만 번번히 떨어졌다. “활동내용 및 옥고 사실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미비하다”는 게 이유다.
고등외사월보는 물론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자공훈서 제6권에도 항일단체로서 우리회와 주동자였던 김씨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도 그렇다. 우리회 동지인 이모씨는 20여년 전 이미 보훈 대상에 올랐던 점과 비교하면 어처구니 없다. 이씨는 물론 사범학교 동기 20명, 부여의 고령 생존자 10여명이 김씨의 행적에 대한 증언서를 제출했지만 허사였다.
김씨는 협심증과 당뇨 증세가 심한 상태다. 김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쇠잔해지는 육체가 아니라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정부다. 김씨는 “얼마나 더 많은 자료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면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