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오른 팔’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칼 로브(56) 백악관 정치고문 겸 비서실 차장이 13일 이달 말 사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로브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재선 임기를 1년 6개월 이상 남겨둔 부시 대통령의 시대도 함께 저물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브 고문의 거취는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역정에 큰 획을 그을 정도로 부시 대통령과 영욕을 함께 해 왔다.
비판자들은 로브 고문에게 ‘부시의 두뇌’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였지만, 부시 대통령은 그를 ‘설계사’로 불렀다. 여기에는 부시 대통령이 2000년, 2004년 대선에서 잇따라 자신을 대통령 자리에 올려준 ‘선거의 귀재’에게 보내는 신임과 고마움이 담겨 있다.
부시 대통령과 로브 고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브는 아버지 부시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시 대통령과도 친분을 맺었다.
이후 로브는 한때 술주정뱅이였던 부시 대통령이 1993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치 자문역을 맡았다. 부시 대통령이 주지사 선거는 물론 두 번의 대선에서 승승장구함으로써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없어서는 안될 정치 전략가로 자리를 굳혔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 로브 고문과 함께 나타나 “(사임에도 불구) 우리는 오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14년 지기인 로브 고문에게 안겨준 권력은 그러나 영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백악관에서 딕 체니 부통령 다음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막후 실세라는 얘기가 나돌면서 로브 고문은 민주당 등 비판세력들에게는 부시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없고 국정을 농단하는 ‘정치 책략가’로 비춰졌다.
부시 대통령의 호전성과 공격성, 일방주의, 독선 등의 정치적 특성도 로브 고문과 연관된 것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았다.
그는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 신분누출 사건인 ‘리크 게이트’의 당사자로 지목돼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았고, 잭 아브라모프 로비 스캔들에 연루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올해 들어선 연방검사 무더기 해임 사태에 개입됐다는 정황들이 포착되면서 로브 고문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의 증언 소환장을 받는 제1의 표적이 됐다.
로브 고문의 ‘책략’도 이라크전 등으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빛을 잃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의 지배권을 모두 민주당에 내줌으로써 로브 고문의 선거 귀재로서의 명성도 순식간에 날아갔다. 중간선거 패배는 로브 고문에게는 가장 뼈아픈 것이었다.
로브 고문의 사임으로 부시 대통령의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으나, 민주당 정치공세의 타깃인 로브의 부재가 권력 누수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민에게서 거부당하는 부시 대통령 곁에서 로브 고문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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