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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2>로마-영원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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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2>로마-영원한 도시

입력
2007.08.1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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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엘 처음 간 게 1993년 1월이다.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로마에 일주일 머문 뒤 밀라노로 가서 네 밤을 잤고, 토리노에서 하룻밤을 잔 뒤 파리로 돌아왔다. 그 때 내게 맡겨진 일감은 이탈리아의 영화산업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그 이탈리아 출장에는 아내도 동행했다.

열흘 이상 파리에 혼자 남아있는 게 따분하기도 했겠지만, 이탈리아의 이미지가 아내에게 바람을 넣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여행 뒤로는, 출장에 동행하겠다는 말이 쑥 들어갔다. 궁상스러운 여행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겠지.

아내와 함께한 그 이탈리아 나들이는 궁상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기자들’ 재단에서 받은 한 사람분의 교통비와 체재비로 둘이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묵는 곳은 허술했고, 먹는 것은 거칠었다. 로마에선 테르미니역 부근의 허름한 여관에 묵었는데, 객실에 화장실이 딸려 있지 않아 복도 끝의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다.

난방도 시원치 않아 아내와 나는 옷을 껴입고 잤다. 여관의 주인아주머니는 프랑스어도 영어도 할 줄 몰라서, 우리는 <여행 이탈리아어> 책과 손짓 발짓에 기대어 겨우겨우 의사를 소통했다. 그 여관에서 아내와 나는 몇 차롄가 통닭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테르미니역 근처에는 통닭집이 많았다. 겉보기엔 먹음직스러웠으나, 막상 입에 대면 너무 짜서 식욕이 가시곤 했다. 지금도 로마의 통닭을 생각하면 혀에 소금기가 느껴진다. 그 찝찔한 통닭들은 팔 때부터 온기가 넉넉지 않았고,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식는 속도도 빨랐다.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내가 확신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통닭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한국이라는 점이다. 파리에서 곧잘 사먹었던 통닭도, 로마 것보다는 나았으나, 뭔가 모자랐다. 특정한 상표의 닭튀김을 온 세상에 퍼뜨린 나라, 미국에서 먹어본 통닭도 한국 것만은 못했다.

객지를 돌아다니며 가장 시원찮게 먹었던 곳이 로마다. 1인분 출장비로 이탈리아에서 두 주 가까이를 버틸 일이 만만찮아 보여, 아내와 나는 특히 로마에서 ‘내핍생활’을 했다. 밀라노는 로마보다 물가가 더 비싸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로마에서 돈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짜고 차가운 통닭말고 아내와 나의 끼니를 해결해준 것은 맥도날드 햄버거였다.

일반 식당엘 가면 아무리 수수하게 먹어도 햄버거 메뉴 두 배 값은 나오니, 맥도날드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머물던 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국 식당이 하나 있긴 했으나, 아내와 나는 거기 가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우리는 로마의 가난한 커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로마에서 들떠 있었다. 처음 가보는 외국 도시에서 들뜨는 것은 자연스럽다. 더구나 그 곳이 로마라면 들뜨지 않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게다. 영원한 도시(‘치타 에테르나’) 로마, 세계의 수도(‘카풋 문디’) 로마 말이다.

비록 궁상스럽긴 했으나, 아내와 나의 로마 체류는 ‘로마의 휴일’이었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처럼 잘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때 우리는 30대 ‘푸른 나이’였다.

파리 리용역을 저녁 7시쯤에 떠난 열차는 이튿날 아침 9시가 다 돼서 로마 테르미니역에 닿았다.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서 기차는 오래 쉬었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즈음엔 밤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다보면 국경에서 쉬는 일이 잦았다.

출발지 쪽 승무원이 걷은 여권들을 도착지 쪽 승무원이 살펴보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침대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일이 처음이었던 터라, 나는 잠을 깊이 이룰 수 없었다. 아내도 그랬던 것 같다. 잠자리가 갑자기 바뀐 탓이 컸겠지만, 침대칸에선 도둑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은 탓도 있었을 게다.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우리가 한 일은, 밖으로 나와 햄버거로 요기를 한 뒤 무작정 로마를 쏘다닌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데서나 내렸고, 조금 걷다가 다시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데서나 내렸다. 아무 버스면 어떻고 아무 데면 어떠랴? 그 버스가 로마의 버스고, 그 곳이 로마라면. 그런 ‘랜덤 관광’은 로마에 머무는 동안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로마와 파리는 자매도시지만,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 두 도시는 꽤 달라 보였다. 파리엔 근대 이후의 분위기가 압도적이라면, 로마엔 중세 이전의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파리의 유적들은 후세 사람들의 섬세한 손길을 받았으나, 로마의 유적들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버려져있는 것들 하나하나가 옛 사람들의 숨결을 내뿜고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텅 비어있는 콜로세움에 들어가 나는 아내에게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이거 콜로세움 맞지? 사진이랑 똑 같잖아 이거.” 아내는 내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대 로마의 건국 신화가 스며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도 그랬고, 그 로마문명의 무진장한 화석이라 할 포로 로마노에서도 그랬다. 우리는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에서 허영심에 이끌려 고대 세계의 수도로 온 촌것들이었다.

관광객들이 흔히 그러듯, 우리는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다. 언젠가 로마에 다시 오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스페인광장에선 거리의 화가에게 붙들려 난생 처음 내 초상화를 갖게 되었다. 그 화가는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일본인 캐리커처의 전형적 특징인 뻐드렁니 두 개를 내게 선사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유럽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한국인은 반쯤은 일본인이고 반쯤은 중국인인지도 모른다. 그 초상화를 지금도 지니고 있다. 그 해 말, 아홉 달간의 유럽 체류를 소설 형식에 담아 <기자들> 이라는 책을 내며, 나는 그 일본인 얼굴을 책날개에 실으려 했다. 그러나 출판사 주간 L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로마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로마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척 보기에도 우리가 이방인이었으니, 더 쉽게 표적이 됐을 게다. 로마에서, 아내와 나는 몇 차례 소매치기를 만났다. 아니, 날치기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다가오는 순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거리에서, 그들은 떼로 덤벼들었다. 로마에선, 집시(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들 너덧과 함께 구걸을 하는 양 다가오면, 그들을 날치기로 의심하는 게 안전하다. 그들은 순식간에 표적을 에워싸고 주머니를 뒤진다. 버스 안에서 자꾸 밀치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소매치기가 아닌가 의심하는 편이 좋다. 로마에서 우리가 만난 소매치기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로마에 도착한 날 걸인으로 가장한 날치기 가족과 드잡이를 한 뒤, 아내의 눈길은 매서워졌다. 아내는 그들의 의도를 금세 눈치챘고, 프랑스어로 왁! 왁! 소리지르며 그들을 뿌리치곤 했다.

아내도 나도 신자가 아니(었)지만,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서 우리는 잠깐 예수에 대해, 성베드로에 대해, 그리고 요한 바오로2세에 대해 경건한 얘기를 나누었다.

따지고 보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통일되기까지 로마라는 도시는 오직 영혼의 수도였고 교황의 수도였다. 교황은 분열된 이탈리아를 원했고, 그래서 통일운동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통일 이탈리아의 첫 수도는 로마가 아니라 토리노였다.

표준 이탈리아어도 로마 둘레의 라치오 방언이 아니라 <신곡> 의 언어였던 토스카나 방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단테의 고향 피렌체가 토리노에 이어 이탈리아왕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된 데는 그런 배경도 깔려있었을 게다.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가 이탈리아왕국을 선포하고 10년이 지나 로마를 점령한 뒤에야, 이 도시는 새롭게 태어난 통일 입헌군주국의 수도가 되었다.

중세 이후 이탈리아 통일까지, 세속의 수도는 유럽 여러 곳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세속의 권력자들도 로마라는 이름을 원했다. 아헨과 빈과 콘스탄티노플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들은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비잔티움제국은 말 그대로 동로마제국이었고, 샤를마뉴(카를대제)는 교황 레오3세로부터 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아 썼다. 중세 이래 19세기 초까지 갈가리 찢겨 존속했던 독일 제1제국의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었고, 러시아의 이반3세는 모스크바를 콘스탄티노플에 이은 제3의 로마라 불렀다.

로마에서 내가 직무와 관련돼 한 일이라고는 영화촬영소 치네치타와 영화사 펜타필름을 방문한 것, 그리고 몇몇 언론사의 영화 담당 기자들과 어울린 것뿐이다. 실상 그것도 일 겸 놀이였다.

치네치타는 상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내 상상이 너무 과격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뜻 그대로 ‘영화 도시’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치네치타는 유럽에서 가장 큰 영화촬영소라 한다. 윌리엄 와일러가 연출한 영화 <벤허> 의 그 유명한 마차경주 장면이 바로 이 치네치타에서 찍혔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진 게 효과가 있었던지, 나는 그 이듬해 여름 다시 로마에 가게 되었다. 이번엔 아내만이 아니라 부모님과 두 아이가 동행해 여섯 식구가 갔다.

그 두 번째 방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 하루였다. 게다가 매우 우울한 방문이었다. 여덟 살이었던 둘째 아이가 열차에서부터 멀미를 하더니 거의 종일 내 등에 업혀 다녔다. 나쁜 우연들이 겹치면서 경찰서를 몇 군데 전전하기도 했다. 그 하루는 되돌아보기도 싫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로마에 다시 가게 될 게다. 그 날도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으니.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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