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고 한 마디 했다가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사태를 어디로 끌고 갈지는 그들의 의지에 맡겨두고, 차분하게 작품분석이나 하는 게 좋겠다. <반지의 제왕> 보다 뛰어나서 전 세계에서 80억 달러를 벌어들일 것이라던 작품. 잔뜩 기대를 하고 갔으나, 영화는 솔직히 말해 봐주기 좀 민망했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반지의>
<디워> 는 극의 결말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도입한다. 그 많던 부라퀴 대(大)군단이 갑자기 발동된 목걸이의 힘으로 일거에 날아가고, 악한 이무기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선한 이무기의 손으로 처리된다. 위기의 해결은 주인공들이 극중에서 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디워>
여자를 구하는 것도 대부분 동료 기자, 거리의 경관, FBI 요원, 그리고 스승인 보천의 일이다. 남자는 자기가 보호할 여자를 만나고서도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끝까지 모른다. 보천이 나타나 그에게 위기 해결의 방법을 가르쳐주나, 이든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대책 없이 도망만 다닌다.
운명을 극복할 것이라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이든은 아무 생각이 없다. 목표 자체가 사라지니 극 속에서 주인공들의 행위가 방향을 잃는다. 그리하여 위기의 해결을 위해 그들이 한 일이라곤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부라퀴 군단에게 잡히는 것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하나의 행위에 이어서 다음 행위가 일어나는 것과, 하나의 행위의 결과로 다음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다르다. 행위와 행위가 인과의 사슬이 엮여서 결말로 이어져야 하나, 극 속에서 두 남녀의 행위는 결말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극작의 기초를 무시한 어처구니없는 패착이다.
주인공들이 극 속에서 할 일이 없으니, 성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못 찾는다. 둘의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감정을 발전시킬 계기도 없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키스를 나눌 때, 관객은 당혹하게 된다. 두 남녀가 헤어질 때 감정이입이 안 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심형래 감독의 야심작 <티라노의 발톱> 은 운 없게도 <쥬라기 공원> 과 같이 개봉되었다. 두 공룡 영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 아마 영화=컴퓨터그래픽(CG)이라는 등식은 이 쓰라린 체험을 통해 형성됐을 것이다. CG에 영화의 생명이 달렸다는 그의 확신은 마치 동면의 양면처럼 <디워> 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구성한다. 디워> 쥬라기> 티라노의>
장점이란 물론 한국의 기술로 할리우드에 육박하는 CG를 만들어낸 데 있다. 가령 LA 도심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볼 만하다. 선한 이무기가 용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어딘지 게임 화면 같고, 전투 장면은 다른 영화에서 이미 본 듯하나, 부라퀴가 리버티 빌딩을 감아 올라가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CG를 자랑하려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플롯과의 결합에 무리가 생긴다. 가령 조그만 조선의 성읍 하나를 치려고 SF 대군단이 동원된다. LA에서는 그래도 현대적 군대와 맞싸우나, 여기서도 대군단은 겨우 여자 하나 잡기 위해 동원됐다. 보천의 이유 없는 변신 역시 CG 변형기술의 시연에 가깝다.
<티라노의 발톱> 과 <쥬라기 공원> 의 차이는 실은 CG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심감독은 CG의 차이를 좁히는 데 몰두하다가 그것 못지않게 현격한 대본, 연출, 편집의 수준 차를 잊은 듯하다. <쥬라기 공원> 에서 공룡에게 ?기는 장면은 거의 공포를 유발하나, <디워> 에서 두 남녀가 ?기는 장면엔 별로 긴박감이 없다. 디워> 쥬라기> 쥬라기> 티라노의>
심형래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봐도 정작 대본, 연출, 편집에 관한 얘기는 별로 없다. 그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은 애국 코드(한국 영화의 할리우드 점령), 민족 코드 (한국적 모티프의 사용), 시장 코드(CG 기술의 국산화), 그리고 파란 많은 인생극장에 관한 언급뿐이다.
물론 이 영화 외적 코드들을 마케팅에 동원하는 것은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마케팅 원리로 영화의 미학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디워> 에서는 이 영화 외적 요소들이 이렇다할 미학적 가공 없이 곧바로 생경하게 작품 속으로 치고 들어온다. 디워>
가령 조선의 남녀가 별 설정 없이 500년 후 LA에서 환생한다. 이는 한국의 할리우드 입성이라는 애국 코드다. LA에서 미국인 주인공들의 이별 장면에 생뚱맞게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한국적 모티프 사용이라는 민족 코드다. 자막으로 올라가는 감독의 변. 이는 감독의 인생극장을 작품에 기계적으로 외삽한 결과다.
“플롯은 허술해도, CG는 볼만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사실 네 가지 코드 중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고유한 영화적 요소다. 하지만 CG에 모든 것을 걸다 보니, 영화의 본질을 이루는 다른 요소들이 모두 CG 기술 위에 대충 얹힌 느낌을 준다. 가령 플롯 상 굳이 필요하지 않은 대군단의 등장을 생각해 보라.
심형래 감독?다음 작품을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애국 코드, 민족 코드, 인생극장 코드이고, 그 대신에 취해야 할 것은 대본, 연출, 편집의 능력이다. CG 기술은 이미 노하우로 확보가 되어 있으니, 거기에 충무로에서 발전시켜온 영화문법을 결합시킨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미국 개봉을 위해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대마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떤 식으로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처리해야 한다. 재편집을 통해 극 속에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을 슬쩍 깔아놓든지, 그게 불가능하다면 제작자 노트를 통해 영화 외적으로라도 설명을 해야 한다. CG도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눈에 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란?
난데없이 神이 해결사로 등장…작품의 질을 턱없이 떨어뜨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란 글자 그대로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오늘날의 영화처럼 인기가 있는 대중문화였다. 하지만 아직 극작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극작가들은 종종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고선 거기서 빠져나올 길을 못 찾곤 했다.
이렇게 벌여놓은 일이 수습이 안 될 때, 그리스의 작가들은 종종 기계장치로 신으로 분장한 배우를 무대 위에 내려, 그로 하여금 주인공을 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위기의 해결을 인간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에게 맡기는 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한다.
오늘날 그리스 연극에 사용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아, 실제로 이 장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의 발명가 헤론이 그린 장치의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 면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작가들이 플롯을 전개시켜 놓고 수습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특히 유리피데스는 이 장치를 자주 사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가령 그의 작품 <알케스티스> 에서는 극의 마지막에 갑자기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여주인공의 목숨을 구해준다. 알케스티스>
여기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다. 극작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시학> 에서 이 고대의 철학자는 작가들에게 극의 결말을 이렇게 외부에서 개입되는 우연에 맡겨버리는 것을 피하라고 권한다. 시학>
이 원칙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모든 영역에 적용되고 있다. 물론 극작술이 풍부히 발달한 현대의 작품에서 이 장치가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젠가 어느 드라마에서 극의 결말을 위해 등장인물 둘을 석연치 않은 동기로 죽게 한 일이 있었다. 시청자들이 벌떼같이 항의를 했음은 물론이다. 이제는 작가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조차 위기의 해결을 우연의 개입에 맡겨버리는 설정이 엉터리라는 것을 안다.
현대의 영화에서도 가끔 대본의 미숙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경우 작품의 질은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결말을 우연에 맡기고도 작품으로 살아남으려면, 물론 플롯의 진행이 그 결함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긴박하고 극적이어야 할 게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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