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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무대다] <32> 선일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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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무대다] <32> 선일금고

입력
2007.08.1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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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계속 끌어 나가야 하나, 아니면 문을 닫아야 하나. 하지만 이때 남편의 생전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평생 금고 하나에 고집스럽게 매달려온 남편의 모습이 떠올리자 다시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국내 3대 금고업체인 선일금고 김영숙 사장이 3년 전 일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다. “처음에는 회사를 남에게 넘기고 조용히 살까도 생각해봤지만 남편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회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주부였던 김 사장이 갈등 끝에 경영 현장에 뛰어든 이유는 이랬다.

이 때가 2005년 1월. 김 사장은 회사를 직접 맡자 마자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회사 내부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남편이 생전에 못다한 일까지 이루자’는 비장한 각오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작지만 강한 기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회사의 기준의 틀을 하나씩 고쳐 나갔다. 맨 먼저 손을 덴 것은 디자인 부문. 금고하면 사각형의 무거운 쇠로 된 것으로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는 기존 인식을 깨고 싶었다.

김 사장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에게 금고를 적극적으로 호소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며 “디자인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 중소기업청 등과 같은 관계기관, 대학교 등의 산학 협동을 통해 기존 틀에서 벗어난 디자인 개발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디지털 방식의 고품격 가정용 내화 금고인 NPS 시리즈. 이 제품은 기존 디자인을 과감히 벗어난 모던하고 스타일시한 디자인으로 일반가정 및 사무실의 다양한 인테리어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제작됐다.

이 모델은 요즘 전자 제품 트렌드에 맞게 원터치 방식을 채택했다. 기존 모델이 고무 버튼식의 투박한 디자인이었으나 이 제품은 에어컨이나 냉장고처럼 터치식 전자락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모델이 시장에 나오자 마자 국내 건설업체들로부터 러브콜이 밀물 듯 들어왔다.

아파트 시공 시 기본 옵션으로 이 금고 모델을 적용하겠다는 것. 김 사장은 “포스코건설, 삼성물산 등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들이 가정용 내화금고 납품을 요청해 왔다”며 “조만간 고급 아파트에서 이 모델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사장이 디자인과 함께 역점을 둔 것은 브랜드 전략이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도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브랜드가 필수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김 사장은 브랜드 이미지와 신뢰도를 쌓기 위해 세계 각국의 관련 인증은 모조리 따내는데 주력했다.

이 회사의 고유 브랜드는 ‘이글 세이프스(EAGLE SAFES)’. 주문자상표제작(OEM)의 경우에도 독수리 상표는 꼭 부착하도록 고집해 브랜드는 달라도 독수리 상표를 보면 선일금고에서 제작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선일금고는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미국 UL로부터 내화금고로는 유일하게 내화ㆍ내충격을 동시에 만족하는 제품 인증을 받았다. 유럽시장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 품질규격 인증, 러시아 연방규격 인증 등 내화금고와 관련된 세계적인 인증을 거의 획득했다.

이런 인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우선 섭씨 1,100도에서 1시간을 견뎌 내용물이 안전하게 보관되는 지를 실험한다.

이어 1,100도의 가마 속에 금고를 넣어 30분간 급가열한 후 꺼내 9m 높이에서 추락시킨 뒤 다시 가마에 넣어 30분간 가열, 금고 속의 내용물을 점검하는 시험을 거쳐야 한다.

김 사장의 고집스런 디자인과 브랜드에 대한 열정은 곧바로 세계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선일금고는 매출의 80%를 미국 유럽 아시아 등 100여 개국으로 수출하는 세계 3위 업체다.

미국의 최대 금고판매점에 가 보면 독수리표 금고가 절반이 넘고 가장 비싸다. 유럽과 중동 등 세계 곳곳에 독수리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다. 이런 결과로 2006년 정부로부터 1,000만불 수출탑을 받았다.

선일금고에서 고(故) 김용호 회장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선일금고 하면 세계 최고의 금고기술이라는 등식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김 회장이기 때문이다.

6ㆍ25전쟁 통에 13세의 나이로 전쟁 고아가 돼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김 회장은 10대에 밑바닥 생활을 했다. 금고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 때.

생계라도 잇기 위해 집 부근 금고 제조회사(중앙금고)에 들어간 게 지금의 선일금고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고물상에서 산 고장 난 금고를 해체하고 조립하기를 수십 번 되풀이 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독일과 일본의 금고회사에서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선진기술도 익혔다.

김 사장은 교통사고로 불시에 남편을 잃었지만 외롭지 않다. 든든한 두 딸이 김 사장 옆에서 회사 경영을 도와주?있기 때문이다.

큰 딸인 은영씨는 대학(고려대)에서 제어계측공학을 전공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조담당을 맡고 있다. 대학(이화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둘째 딸 태은(27)씨는 해외 영업팀에서 일하고 있다.

김 사장은 “금고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업이 되겠다”며 “조만간 미국의 금고 브랜드를 인수해 이글 세이프스와 함께 세계 최고 브랜드로 키워낼 것”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인호 기자 yih@hk.co.kr

■ 세계가 인증한 선일금고의 기술력

2004년 4월 낙산사 화재로 각종 문화재급 유물들이 모두 불에 탔으나 유일하게 멀쩡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선일금고가 제작한 내화금고였다. 김영숙 사장은 “낙산사 대형화재는 보물 479호 동종마저 녹아 내릴 정도였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우리 제품은 멀쩡해 그 속의 귀중품이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내화금고와 관련된 일화는 이 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 2월 파주시 봉일천에 있는 한국유통에 화재가 발생해 3시간 만에 건물이 전소됐다.

화재 현장을 정리하던 중 잿더미 속에서 원래 건물 2층에 있던 금고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놀랍게도 각종 서류와 현금 1,600만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금고는 선일금고의 ES-080모델이었다.

일반 금고들은 불 속에서 한 시간 정도면 내용물이 대부분 타버리지만 선일금고의 제품은 내화성이 뛰어나다.

1,000℃가 넘는 온도에서 3시간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차례 대형화재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김 사장은 “장시간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내화성 금고 개발에 특화해 왔다”며 “불이 나서 제품 성능을 검증할 기회는 많지 않은데 여러 번의 대형 화재로 회사의 기술력을 간접적으로 입증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화재나 건물 붕괴 등의 충격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것은 과정이 까다롭고 엄격해 나라별로 인증을 모두 획득한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선일금고가 금고 한 분야에서 32년 간 선두업체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기술력 때문이다.

다이얼 방식이 아닌 디지털 잠금장치를 접목한 곳도 선일금고다.

하지만 보안성이 생명인 금고에 장착하는 것은 기술상 여러 난제가 따랐다. 선일금고는 이를 위해 3년간 5억원의 개발비를 쏟아 부었다.

디지털 금고는 외문형 금고와 함께 선일금고가 세계표준으로 정착 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이밖에 지문인식 금고, 다이얼로 열고 닫는 금고, 경보기 부착 금고 등 신개념 제품 대부분도 선일금고가 국내 최초로 만들어 보급한 제품들이다.

김 사장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미개척지인 ‘건세이프(총기 금고)’ 시장까지 진출한다. 최근 미국측 바이어들로부터 제품 개발 제의가 들어와 중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제품 개발을 완료했다.

조만간 총기 금고의 최대 시장인 미국에 선적할 일만 남았다. 김 사장은 “총기 금고 시장까지 정복한다면 세계 1위의 업체로 올라서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신제품 개발에 더욱 몰두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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