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읍에 사는 사람이 새로 생긴 대형 마트에서 상추 한 봉지를 샀다. 예쁜 포장지엔 고랭지 채소임을 자랑하는 글이 인쇄돼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30㎞정도 떨어진 인근 마을에서 재배된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읍을 거쳐 도(道) 집하장소를 통해 서울로 올라간 뒤 다시 역순으로 내려오는 동안 800여㎞를 이동했던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포장하는 노동자, 운송하는 트럭운전자, 판매하는 종업원 등 모두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좀 찜찜하다. 그 가격으로 한 보따리를 살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유통마진의 문제만은 아니다.
■푸드 마일(Food Miles)이란 농산물 등 식료품이 생산자 손을 떠나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이동거리를 일컫는 말이다. 1994년 영국의 소비자운동가 팀 랭(Tim Lang)이 발표한 '식료품 장거리 수송은 인류의 재앙'이란 내용의 보고서 제목이다.
이동거리를 최소화 하여 자국과 인근지역의 농업을 지키자는 캠페인이었지만, 이론적 근거는 항공기와 트럭이 동원된 수송과정에서 교통혼잡은 물론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해 지구온난화를 부채질 한다는 것이다. 생산뿐 아니라 수송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Eating Oil' 문제다.
■'당신은 석유를 먹고 있다'는 경구를 앞세운 'Eating Oil'은 일차적으로 해외에서 수입된, 소비자의 감독 밖에 있는 농산물엔 엄청난 화학비료가 포함됐음을 상기시킨다.
더 중요한 것은 1㎈의 에너지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수십~수백㎈의 운송에너지가 소비되었다고 경고한다. 우리의 신토불이(身土不二)에 해당하는 'Local Food(지역 먹거리)'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도시인들이 주말농장에서 나아가 주택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 밭'까지 일구고 있다. 지구촌의 농민이 매년 8억 명씩 늘어난다는 유엔 통계는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유럽에서 상품의 생산ㆍ운송에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됐는지 알 수 있도록 '탄소 발자국'을 표시하는 캠페인이 벌어지더니, 최근 영국에선 이를 법제화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발자국이 없는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한창이다. 그 시각, 아프리카 케냐의 농부가 손으로 콩깍지를 까며 "우린 이산화탄소와 전혀 무관한데 왜 영국이 우리 농산품에 금수조치를 한답니까?"하며 한숨을 짓는다.
농업국가 케냐에서 생산된 콩의 40%를 영국인이 먹고 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한 '푸드 마일'개념이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이러니를 어찌할까.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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