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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아프간에서 뭘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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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아프간에서 뭘 배울까

입력
2007.08.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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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무렵, 전쟁의 의미를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자료를 열심히 찾았다. 미국은 뉴욕 테러의 배후 알 카에다와 탈레반 정권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으나, 국제사회는 중앙아시아의 석유등 전략적 이익을 노린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전쟁 목표를 올바로 가늠하려면 아프간의 지정학적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했다.

국내에는 도움되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더러 급히 내놓은 연구도 미국이 표방한 대 테러전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외국자료도 흔하지 않았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등이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 다툼을 예견했으나, “지금 왜 아프가니스탄인가”라는 의문에 분명한 답을 얻기에 미흡했다.

● 무지와 오만이 비극의 근원

그런 가운데, 2001년 예일대 출판국이 발간한 파키스탄 언론인 아흐메드 라쉬드의 저서 <탈레반> 이 돋보였다. 21년간 아프간 전문기자로 일한 라쉬드는 아프간 역사와 지정학에 얽힌 오랜 모순, 탈레반 혁명, 중앙아시아의 분쟁요소 등을 잘 정리했다. 미국과 서구 비판을 자제한 흔적이 있으나, 아프간의 과거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은 탁월했다. 그 요지를 다시 살펴보자.

18세기 파슈툰 부족연합이 세운 아프간 왕국은 내분으로 이내 쇠퇴했고, 19세기 남진을 노리는 러시아와 식민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다툼에 휘말려 주체적 존립 능력을 상실했다.

두 나라는 한 세기에 걸친 ‘큰 게임’(Great Game)에서 무력 대결보다 아프간 부족과 파벌을 상대로 은밀한 지원과 매수, 암살과 전복 등 공작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아프간을 무력화, 상호 진출을 견제하는 완충으로 삼았다. 아프간 부족과 파벌도 외세 결탁과 모반, 약탈과 납치로 생존을 도모하는 무리로 전락했다.

소련 침공과 무자헤딘 항전도 시대 배경과 명분이 다를 뿐, 지정학과 외세가 결정한 비극적 운명의 반복이다. 오랜 외세 침탈을 겪으면서 아프간은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했다.

옛 왕조의 고도 칸다하르에서 태동한 탈레반은 이 운명적 질곡의 타파를 표방, 군벌의 탐학에 시달린 민중을 구제하고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웠고 혁명적 수단을 동원했다.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된 라쉬드의 저술은 전쟁의 의미뿐 아니라 그 불확실성까지 내다본 통찰력을 지녔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탈레반의 가혹한 혁명 통치와 바미얀 석불 파괴 등의 단편적 에피소드를 통해 아프간을 인식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 바탕에서 전쟁의 정당성과 장래를 심각하게 논쟁하지 않은 채 어느 사회보다 선뜻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국익 논리가 사회를 지배한 결과다. 그러나 그 뒤 전쟁의 양상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대외적 허영심ㆍ위선 버려야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가 해외 경략과 파병에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갖고서도 치열한 사회적 논쟁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탈레반 지도부를 쫓는 미군이 ‘큰 게임’의 주역 영국 정보기관과 특수부대의 향도 역할에 의존하는 것에 비춰, 우리가 파병의 국위선양 효과부터 떠든 것은 무모하고 오만하기까지 했다.

아프간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정글북> 의 작가 존 루디야드 키플링이 일찍이 ‘큰 게임’을 배경으로 쓴 등 첩보 모험소설로 훨씬 유명하고, 그 역사와 소설의 현장을 추적한 책이 많은 것을 발견하고는 나 자신 무지함을 절감했다.

아프간 인질사태를 겪으면서 해외 지식과 전문가 부족을 새삼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해외 참전 등 국가활동 폭을 넓히는 데는 뚜렷한 목적과 수단을 갖춰야 한다는 서구의 교훈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 준비 없이 위선된 명분을 좇는 것은 위험한 허영심에 불과하다. 인질 구출이 급하다는 이유로 성찰을 가로막는 위선부터 버려야 한다. 그게 진정 인명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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