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과학, 미래를 만든다] <2> 중성미자 잡아라 - RENO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과학, 미래를 만든다] <2> 중성미자 잡아라 - RENO

입력
2007.08.14 00:08
0 0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원소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한 이래 2,500여년 동안 인류는 그 해답을 구하고 있다. 다만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직관적 사고 대신 거대한 장비를 동원한다.

실제로 미국 페르미연구소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천문학적 연구비가 들어간 입자가속기라는 수㎞ 반경의 장비를 설치하고, 연구자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월드 와이드 웹(www)을 만들어낸 ‘거대 과학’의 현장이다.

이런 거대 과학판에서 한국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 그야말로 ‘돈이 되는 연구’만 했다.

하지만 우리 과학자가 거대한 입자물리실험을 주도할 수 있는 때가 왔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수봉 교수가 이끄는 50여명의 연구팀은 전남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를 이용하는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RENO)’에 착수했다. 과학자들의 속을 태우는 마지막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중성미자 검출기가 생각보다는 훨씬 커서 높이 8m 총 무게 300톤이며, 다른 빛 신호와 헷갈리지 않기 위해 원전 옆 산에 깊은 터널을 뚫어야 한다. 90억원의 연구비를 들인 이 실험 결과는 2012년 나올 예정이다. 연구팀은 현재 암반조사를 마치고 11월 굴착을 앞두고 있다.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를 찾기 위해 달리는 것은 한국 과학자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double-CHOOZ 실험팀과 중국 Daya Bay 실험팀이 방식과 시기가 거의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려 숨이 찰 지경이다.

우리 정부가 전투기나 신약이 나오지도 않는 순수 기초 물리학 연구에 90억원을 쏟아 붓는 것도 놀라운 데, 비슷한 실험이 2개나 더 있다니. 예전 같으면 ‘연구비 낭비’라며 포기 했겠지만 우리가 양보 못하는 이유가 있다.

중성미자는 우주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핵융합 반응을 하는 태양에서도 나오고, 핵분열 되는 원전에서도 나온다. 1초만 엄지손가락을 들고 있으면 태양에서 오는 중성미자 1,000억개가 엄지손톱(1㎠)을 통과하는데, 원전에서 나오는 양은 그 100배다. 하지만 거의 상호작용 없이 그냥 지나쳐 간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거대한 검출기를 지어 원전이나 태양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를 관측해 왔다. 50년대부터 하루에 고작 몇 개의 중성미자를 보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중성미자는 세 종류가 있고 ▦질량이 있어 서로 다른 종류로 바뀌며(진동변환) ▦중성미자들끼리 변환하는 세기인 진동변환상수 3개 중 2개가 어느 값인지 파악했다. 그런데 한가지 상수만은 너무 작아 70년대부터 번번이 측정에 실패했다.

90년대 들어 검출기 크기를 키우고 거리를 늘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변환상수 값보다 검출기의 측정 오차가 여전히 컸던 것이다.

그러던 2004년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100여명의 물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계산한 결과 원전 가까이 와 멀리 2개의 검출기를 놓으면 오차가 크게 줄어 정밀 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상수를 밝힐 가능성이 눈 앞에 다가섰다.

갑자기 한국 물리학자들이 바빠졌다. 6기의 원자로가 밀집된 영광 원전은 최근 일본 카시와자키 원전이 지진으로 중단된 후 출력 규모(열생산 17.3GW)가 세계 최대다.

연구 경쟁국인 프랑스(8.7GW)나 중국(11.6GW)보다 중성미자가 많이 배출돼 실험결과를 보기 쉽다는 의미다. 더욱이 한국엔 산이 많아 지하로 파내려 가는 것보다 손쉽게 터널을 뚫을 수 있다.

산 많고 땅 좁고 자원은 없는(그래서 원전이 밀집된) 환경이 물리학 실험의 천혜의 조건이 될 줄은 몰랐다. 검출기 짓는 비용이 물론 적지 않지만, 일본의 K2K, 미국의 MINOS 실험처럼 가속기를 만들어 인공적으로 중성미자 빔을 쏘는 실험에 수조 원이 드는 것과 비교하면 ‘합리적’이다.

연구팀은 실험실 안팎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 지하시설 구축을 책임진 전남대 김재률 교수는 지역 주민, 행정관청의 이해를 구하느라 전남의 인맥을 총동원했고, 서울대 최선호 교수와 성균관대 최영일 교수팀이 책임진 검출기 설계와 시작품 제작은 이미 마무리됐다. 경북대 김동희 교수는 검출기의 핵심 요소인 액체섬광물질을 검토한 끝에 이수화학이 만드는 화장품 원재료 물질(LAB)을 친환경적이고 저렴한 으뜸 후보로 발굴했다. 광센서 등 주요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드물게 국내 조달이 가능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검출기 민감도는 프랑스 팀보다는 높고, 8개 검출기를 지을 중국 팀보다는 낮다. 운 좋게 우리가 진동변환상수를 측정해 내면,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는 대통일이론에는 또 한번 중요한 진전이 이뤄진다.

하지만 중성미자의 변환?예상보다도 훨씬 적다면? 원전의 플루토늄 모니터로 설비를 활용할 길이 있기는 하지만 90억원을 들여 목표했던 결과는 수포가 된다. 노벨상감 연구를 향한 성취욕과 기억 못하는 과학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각오가 함께 한다. 그 심정을 김수봉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 있는지 알고 찾는다면 그건 새로운 발견이 아니겠죠.”

◆중성미자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 중 하나. 기본 입자는 크게 무거운 입자와 가벼운 입자로 나뉜다. 원자 핵(양성자, 중성자)을 만드는 쿼크가 무거운 입자다. 쿼크는 업, 다운, 톱, 보텀, 참, 스트레인지의 6개 종류다. 가벼운 입자도 6개 종류로 낯익은 전자 외에 뮤온, 타우, 전자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가 있다. 중성미자는 관측이 잘 안 돼 유령입자로 불린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 중성미자, 1000㎞밖 日서 쏘고 한국서 받고

한국의 RENO 실험은 2020년대 미래를 향한 첫 걸음일 뿐이다. 이미 3차례 노벨상을 배출한 중성미자 연구는 앞으로도 대통일이론 검증과 관련해 물리학의 중심을 차지할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양국이 긴밀한 공동연구를 논의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피처와 캐처가 되어서 1,000㎞를 가로질러 중성미자 빔을 쏘고 받는 대규모 공동실험을 추진하기 위해 9월 세번째 심포지엄을 연다.

2020년을 바라보는 T2KK(‘도카이에서 카미오카-코리아까지’라는 의미) 실험이 그것이다. 실험의 골자는 일본이 강력한 중성미자 빔을 쏘아보내면 한국에서 초대형 검출기로 이를 측정하는 것. 그러면 중성미자 질량 순서와 CP대칭성붕괴를 발견하는 정밀 실험이 가능하다.

CP대칭성붕괴란 우리 우주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똑같이 상쇄되지 않아 물질의 우주만 남게 된 현상인데,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를 비교하는 실험은 엄두조차 낸 적이 없었던 야심찬 실험이다.

일본은 2008년 도카이에 양성자가속기(J-PARC)가 완공되면 1단계로 5만톤 규모 검출기(슈퍼카미오칸데)에 중성미자 빔을 쏘아 진동변환상수를 정밀 측정할 예정이다. 이어 2단계로 가속기 출력을 0.75㎿에서 4㎿로 높이고, 검출기를 5만톤에서 100만톤(하이퍼카미오칸데)으로 키워 대칭성붕괴 실험에 돌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가속기(도카이)에서 검출기(카미오카)까지 거리가 300㎞밖에 안 돼 2단계 실험에 의문이 제기됐고, 한국에 검출기를 짓는 대안이 급부상한 것이다. 한국이 T2KK 검출기를 지으면 이는 100만톤 규모로 RENO 검출기(표적만 15톤, 총 300톤)와는 비교가 안 되며 비용도 5,000억원이나 든다.

물리학 실험이 커지면서 한국과 일본 같은 좁은 나라는 물리적 국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1,000㎞짜리 통 큰 발상이 나오고 있다.

김희원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