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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9>"다음에는 큰 트렁크를 가져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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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9>"다음에는 큰 트렁크를 가져오라"

입력
2007.08.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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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사업 제1차 예비교섭 마지막 회의가 5월15일 오전 10시30분에 열렸다. 바로 직전에 가졌던 수석대표 간 단독회담에서 중국측은 예비회담을 계속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정상회담이나 본회담은 아직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먼저 장루이지에(張瑞杰) 대사는 밝은 표정으로 이번 회의를 마무리하는 중국측 입장을 정리했다.

중국측 입장 이번 회의에서 한 가지 목적은 달성했는데 이는 상대방의 입장을 잘 알게 되었고 다음 접촉을 위한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의 원칙적 입장을 귀국해서 상부에 보고해 잘 고려해 줄 것을 부탁한다. 중국도 한국측의 원칙적 입장을 상부에 보고하겠다. 제 2차 예비회담은 5월25, 26일 양일간 베이징에서 열 것을 제안하며 돌아가 변동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한국과 중국)는 예비회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본회담과 외무장관회담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자. 우리가 예비회담에서 모든 조건을 마련하여 수석회담은 6월에 베이징에서 하루 정도 진행하기를 희망한다.

권대사가 제 3차 예비회담을 서울에서 갖자고 제안했는데 회담(제2차)이 잘 되면 서울 안 가도 되고 만약 필요하면 서울에 가고 싶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베이징이 좀 낫다.

댜오위타이(釣魚臺)마당에는 기자들이 못 들어온다. 초보적 타산(계산)이지만 이번 회담에서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고 회담이 아주 좋았다. 권대사와 좋은 회담을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다음 번에는 큰 트렁크를 가져오기 바란다(대만문제에 대한 한국측의 확실한 답변을 가져오라는 의미였다).

나는 내심 앞으로 해야 할 문제들은 산적해 있지만 교섭의 불씨를 우선 살려 놓은 데 안도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시점에서 본국의 훈령이나 이상옥 외무장관과 김종휘 수석비서관의 지시사항에서 빠진 것이 없는지 서류를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다음 회담의 의제를 정하는 문제가 미합의로 남아있었다.

나는 이미 우리가 제안했던 대로 두 가지로 의제를 정하자고 거듭 제안했다. 장 대사는 이에 의제를 정하는 게 더 좋으냐 아니냐는 주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중한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양국 외무장관 협의에 의해서 비밀접촉을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된 어떤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중국측 관심은 대만문제라고 결론적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 대표단을 둘러보고 우리가 이번 회의에서 더 챙길 것이나 빠진 것이 없는지 각 대표를 일일이 살펴보았다. 모두 더 할 얘기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대표단이 제 1차 예비회담에서 해야 할 말은 다했고 챙겨야 할 사항은 대체로 회의과정에서 거의 모두 다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장 대사가 말 한대로 이번 회담의 결과를 본국에 가서 잘 보고해서 차기회담에 임할 것이며 제 2차 예비회담의 일정에 잠정적으로 동의를 하고 이번 회담에 대한 장 대사의 평가에 의견을 같이 한다고 화답했다. 이번 회담을 주선해준 중국외교부와 댜오위타이 국빈관 관계자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회의는 끝났다.

우리 대표단은 내 방에 모였다. 대체로 본국의 훈령과 지시대로 시행되었고 무엇보다 차기 예비회담의 일정이 잡혔다는 데 모두들 안도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각자 짐 속에 일체 중국에 다녀 온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부탁했다. 내 말에 따라 귀국길에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챙겨둔 ‘釣魚臺 國賓館’이라고 새겨진 연필과 메모지를 꺼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실수는 내가 했다. 내가 세탁한 내의 중 하나에 ‘國賓館’이란 아주 작은 중국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을 귀국 후에 집사람이 발견하고 내가 중국에 간 것을 처음으로 눈치챘지만 나도 집사람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수교교섭의 임무를 맡은 이래 처음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우리 대표단은 각자 중국에 들어온 경로를 따라 세 그룹으로 나뉘어 다시 조용히 귀국길에 올랐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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