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미 아이코 지음ㆍ이호경 옮김 / 동아시아 발행ㆍ336쪽ㆍ1만5,000원
“부려먹을 때는 ‘천황폐하의 아들’ 이라고 치켜세우고 쓸모가 없어지자 전서구(戰書鳩) 이하의 존재로 멸시당했다.” (정은석ㆍ1942~1945ㆍ말레이시아 팔렘방 비행장건설 감독)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일본 육군은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 당시 일본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무려 26만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연합군 포로는 열대지방의 열악한 조건과 배급부족에 시달리며 비행장, 도로건설에 동원됐으나 무려 27%가 사망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을 감시했던 조선인들의 운명은? 129명은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 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 높았던 일본 헌병의 그것(4.3%)과 맞먹을 정도다. 해방된 조국의 국민도, 패전국의 국민으로도 취급받지 못한 채 이들은 왜 이런 가혹한 운명에 직면했을까?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일본 평화학회장의 <해방되지 못한 영혼> 은 조국에서는 ‘친일 부역자’로 몰리고 일본에서는 ‘전쟁책임을 떠맡은 외국인들’ 로 취급받으며 역사의 낙오자가 된 이들 조선인 전범자 129명의 문제를 조명한다. 해방되지>
저자는 생존 조선인 전범자들의 증언과 비밀문서, 재판기록들을 검토하며 조선인들이 대거 포로감시원들로 뽑히게 된 배경, 태국 말레이 자바 등에서 자행된 처참한 포로관리실태, 전후의 불합리한 재판과정, 책임회피에 급급한 일본정부의 모습 등을 폭로한다.
그는 기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이들의 개인사에 주목한다. 가령 전남 보성 출신으로 태국에서 연합국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던 이학래(80)씨. 총을 쏘지 않아도 되고 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2년이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포로감시원을 자원했던 이씨의 꿈은 종전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씨는 하루 14시간씩 노역해야 했던 지옥같은 태국-미얀마 철도건설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귀국선이 아닌 차디찬 감방이었다. 1946년 영국군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돼 복역했던 이씨는 10년 가까이 싱가포르, 홍콩, 일본의 감옥을 전전하다가 1956년에야 석방됐다.
이씨는 포로감시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다고 자백했지만, 저자는 그것이 과연 ‘전쟁범죄자’ 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힐 만큼 중죄였는지를 반문한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安培原基)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못이 완전히 면책될 수는 없지만 ‘불필요한 것, 방해가 되는 것은 처분하라’는 사고방식을 지녔던 일본인 지휘관들의 명령을 단순히 집행했던 이들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이면서도 전쟁가해자가 돼버린 ‘이중 피해자’ 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석방자들은 일본에서 ‘동진회’ 를 조직하고 50년 가까이 일본 정부로부터의 보상하는 집단투쟁을 했지만, 위로 차원에서 일시적인 생계보조금을 받는 데 그쳤고, 결국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일본인 전몰가족들이 은급(일종의 연금)을 받는 것에 비하면 식민지시절이나 이후에나 이들에 대한 차별은 차이가 없는 것. 오랫동안 고민하던 우리 정부가 지난해 이들을 ‘강제동원희생자’로 인정한 것은 그나마 역사의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저자는 “조선인 전범자들의 처리 문제는 일본인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제대로 추궁됐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 책을 통해 전범과 그 유족들에게 보내는 한ㆍ일 양국민의 시선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