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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공장 화마가 삼킨 안타까운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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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공장 화마가 삼킨 안타까운 사연들

입력
2007.08.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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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자식 신세 안 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목숨보다 더 아끼고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두고 가시다니….”

9일 경기 의왕시 화장품케이스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60, 70대 희생자 6명은 대부분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했던 이들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고 김금중(61ㆍ여)씨는 2000년부터 손자(9ㆍ초등2)를 혼자 키우다시피 해왔다. 등이 굽고 허리가 휘었지만 둘째아들이 이혼하면서 떠맡긴 손자만큼은 제대로 키우기 위해 지극 정성으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4년전 남편 정덕운(64)씨가 환경미화원으로 퇴직해 갈수록 생활은 어려워졌지만, 손자 생각에 힘들고 고된 화장품 공장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빠짐 없이 해왔다고 한다.

경기 의왕시 오전동 의왕선병원 영안실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던 남편 정씨는 “평생 그렇게 고생만 하더니…”라며 말을 잇지 못하다 “혈압도 높고 눈도 잘 안 보인다고 해서 그만 두라고 했는데 ‘손주 녀석 때문에 올해까지는 다녀야 한다’고 말하더니만…”이라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김씨의 여동생(54)은 “엄마 같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고는 손자가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해 너무 딱하고 마음이 아파 미칠 지경”이라며 “1월 생일에 아까워서 미역국도 끓여 먹지 못했던 언니였는데…”라며 울먹였다.

고 박형순(61ㆍ여)씨는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반란사건 당시 육군장교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한국전쟁 당시 재혼을 해 여동생(59)과 함께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5년 전 남편이 위암으로 숨진 뒤 박씨는 극구 만류하던 세 아들을 “몸이 허락할 때까지만 일 하겠다”는 말로 설득해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박씨는 지난 5월 일용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자 더 억척스럽게 잔업을 도맡아 해왔다고 한다. 친정 작은어머니 강진순(70ㆍ여)씨는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사고를 당하고도 안 해 본 일이 없었던 조카였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올 10월 환갑을 앞두고 숨진 윤순금(60ㆍ여)씨의 아들 이경석(32)씨는 “60번째 생신을 맞아 함께 여행을 가자는 말에 그렇게 좋아하셨는데…”라며 “2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누나와 저를 키워 온 어머니는 ‘결혼도 했으니 이제 제가 모시겠다’고 할 때마다 손사래를 치셨다”며 오열했다.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고 변귀덕(60ㆍ여)씨의 외아들 강대식(31)씨는 “굳이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토록 고집을 부리실까 궁금했는데, 제 이름으로 된 적금통장을 보고서야 뒤늦게 알게 됐다”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편 유족들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W산업의 부당노동행위, 화재 당시의 사고경위 등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김재욱 인턴기자(연세대 사회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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