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야 깊숙한 곳에 서 있어도 들리는 주심의 우렁찬 “플레이볼” 외침에 운동장은 통째로 날아갈 듯했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옆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역전 홈런이 터지면 곧바로 친구가 됐다.
대회기간 서울은 ‘팔도 한 마당 축제’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동문과 재학생 향우회가 어우러졌다. 관중석에서 보는 이도, 그라운드에서 뛰는 이도 신이 났다. 그런 맛에 야구를 보고, 야구를 했다.
‘타격의 달인’ 장효조(51ㆍ삼성 스카우트 코치)는 봉황대기 초창기를 대표하는 스타다. 대구상고(현 상원고) 2학년이던 1973년 제3회 대회에 첫 출전한 장효조는 최다안타상을 받으며 모교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듬해에도 그는 4할1푼2리 도루 8개로 봉황대기 사상 첫 2연패의 주역이 됐다.
“74년 4회 대회 결승전이 열리기 이틀 전인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에 저격 당한 사건이 벌어졌어요. 때문에 국민들이 대구상고와 재일동포의 결승전을 저격사건의 한풀이 장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운동장에 들어서는데 ‘오늘 지면 걸어서 운동장을 못 나가겠구나’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장효조 김한근(한양대 코치) 신승석 이승후(이상 개인사업)의 활약 덕분에 대구상고는 10-5로 승리했고, 선수들은‘무사히’ 운동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장효조는 프로야구 삼성-롯데에서 10년 동안 선수로 뛰며 통산타율 3할3푼1리를 기록했다. 3할3푼1리는 프로야구 통산타율(3,000타수 이상) 단연 1위다. 롯데와 삼성에서 타격코치로 8년간 활동했던 장효조는 2005년부터는 삼성 스카우트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엔 봉황대기에 출전해 동대문구장에서 뛰어본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죠. 근데 요샌 많이 (열기가) 갔어요. 재학생 동문 향우회가 하나로 어우러져 야구장이 떠나갈 듯 응원하는 날이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최경호 기자 squeez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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