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은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3주기였다. 다시 말해 ‘현대적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가 95년의 생을 마감한 것은 2004년 8월 3일이었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개념을 만든 장본인인 그는, 일상적 사진의 형식으로 삶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현대적 전통을 수립한 문제적 인물이다.
아버지는 섬유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였고, 외가도 노르망디 출신의 지주 집안이었던 덕분에 카르티에 브레송은 일찍이 사진을 취미로 접할 수 있었다. 요즘의 ‘얼리 어답터’와 같은 태도를 가졌던 유년기의 그는, ‘박스 브라우니’ 등 다양한 사진기들을 접하고 소유했다. 사진이 아직 값비싼 취미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삼촌이 화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스튜디오를 들락거리며 회화의 기초에 눈떴다.
이후 정규 미술교육을 받으며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방법, 즉 일상적 사진에서 의도되지 않은 혹은 예상할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 등을 공부함으로써 영어를 제2의 모국어로 삼았다. 1931년에는 코트 디부아르를 여행하며 사냥을 즐겼는데, 이 경험은 그가 사진기로 ‘이미지를 사냥’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정말로 청년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영감을 준 것은 마틴 문카치의 사진 ‘탕가니카 호수의 세 소년’이었다. 문카치의 생동감 넘치는 프린트에 감명을 받은 그는, 사진이란 매체를 진지한 자세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사진이 회화와는 다른 차원의 예술로 발전할 가능성을 감지했던 것. 눈 밝은 그가 선택한 카메라는 라이카. 당시 신종 기기였던 라이카는 도시의 거리에서 점멸하는 순간순간을 포착하기에 최적이었다. (생전의 작가가 애용했던 프리미어 라이카는 현재 파리의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에 잘 전시돼 있다.)
이후 그는 데이비드 세이모어, 로버트 카파 등의 사진가들과 교유하며, ‘초현실주의 사진가’라는 딱지를 떼고 ‘포토저널리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미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상ㆍ사진병으로 징집됐던 그는 독일군 포로가 되는 바람에 강제 노역에 처했고, 수 차례의 실패 끝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그가 포로가 되기 전에 라이카를 땅에 묻어 숨겨뒀다가 탈주한 다음 되찾은 일화는 유명하다.
전쟁의 막바지,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망했다’는 루머가 미국에 나돌았고, 이는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전설적 예술 후원자인 링컨 커스틴 등의 지원에 힘입은―과 드라마틱하게 맞물리며 그의 이름값을 높였다. 이어 그는 카파 등과 함께 매그넘 포토 에이전시를 설립했고, 간디 장례식과 중국의 국공내전 등 역사적 순간들을 포착한 보도사진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52년, 그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 이 발간됐다. 프랑스판의 제목은 <찰나의 이미지들(images à la sauvette)> 이었다. 하지만 책의 본문에 인용된 17세기의 문구 “결정적인 순간을 갖지 않는 사물은 세상에 없다”에서 따온 영문판의 제목이 더 크게 주목 받았다. ‘사진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당대적 리얼리즘의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즉 그와 포토저널리즘의 최전성기)이었다. 찰나의> 결정적>
1966년 매그넘을 탈퇴한 작가는 초상과 풍경 작업에 몰두했다. 1968년에는 정치적 입지를 활용해 “전후의 소비에트를 자유로이 취재한 최초의 서방 사진기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그는 점차 사진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엔 아예 은퇴를 공식화해, 사진기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다. 당시의 그는, 포토저널리즘의 리얼리티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일 테다.
임근준 미술ㆍ디자인 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