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생’얼굴을 대하는 일은 때로 난처한 경험이다.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페르소나(극 속의 캐릭터)를, 그것을 빚어낸 배우 스스로가 깨뜨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의 벙어리 할머니가 스크린 밖에서 억척스레 수다를 떠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처럼. 집으로>
“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하얀거탑> 에서 장준혁이라는 인물을 그럴싸하게 그려내려고 했을 뿐이에요. 실제 내 삶이 장준혁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사람들이 자연인 김명민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하얀거탑>
영화 <리턴> (감독 이규만)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김명민(35)은 씩씩하고 활달했다. 장중하게 깔리는 특유의 바리톤 음성도 살짝 끝이 감겨 올랐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을 징그럽게 담아 냈던 장준혁의 표정은, 더 이상 그의 얼굴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둡고 깊은 아우라 대신, 밝고 새로운 에너지가 넘쳐 났다. 부질없는 아쉬움이 흘러 잠시 대화가 끊겼다. 리턴>
그가 먼저 새 영화 얘기를 꺼냈다. “<리턴> 의 외과의 류재우는 장준혁과 달리 색깔을 낼 수 있는 여지가 좁은 캐릭터에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50%만 보여주는 것, 그렇게 ‘덜어 내기’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어요.” 김명민은 욕심이 많은 배우다. 힘들고 머리가 아파도 ‘센’ 역할을 좋아한다. 그래서 “무난한 캐릭터로 다른 세 배우(유준상, 김태우, 정유석)와 배역의 무게를 고루 나눠야 한” 이번 영화는 더 어려웠다. 리턴>
<리턴> 의 외과의사 류재우 역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인물. “너무 반듯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캐릭터지만, 범인의 존재를 추적하는 안내자와 같은 역할이다. 그는 “상업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느라 본래 시나리오가 가졌던 스릴러의 맛이 다소 죽었다”면서도 “굉장히 감성적인,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스릴러”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리턴>
김명민은 <더 팬> 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역할을 맡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남성적이고 강한 자극을 주는 시나리오에 손이 간다고 말했다. 더>
하지만 대형 배우들이 으레 그렇듯, TV드라마를 멀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내러티브(서사)에 중점을 두지만, 드라마는 캐릭터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측면이 있어요. 어느 매체에서 연기를 하든 나는 배우일 뿐이에요. 스타가 됐다고 드라마를 낮춰 보는 것은 쓸데 없는 아집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드라마에 애착을 느끼는 배경에는 <소름> (2001년)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알린 뒤, 연이은 세 편의 영화가 잇달아 ‘엎어지면서’ 인생의 쓴맛을 봤던 경험이 있다. “다 접고 유학을 떠나려고 했다”는 그를 일으켜 세운 건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 “촬영기간이 비슷해도 영화는 1주일 정도면 캐릭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데, 드라마는 훨씬 오래 걸려요. <하얀거탑> 같은 경우 (극 속에서) 7,8년의 시간을 장준혁으로 살았으니까….” 하얀거탑> 불멸의> 소름>
그의 다음 작품은 손예진과 함께 출연하는 <무방비도시> . 강력계 형사로 출연해 그토록 원하던 ‘강하고, 세고, 사이키델릭한’ 매력을 한껏 분출한다. <하얀거탑> , <리턴> 을 하면서 “웬만한 봉합수술을 할 정도로” 연습을 했다는 그가 이제 경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난 배우고,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이에요. 이 영화가 개봉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나를 외과의사의 이미지로 기억할까요?” 답은 몇 달 후면 알 수 있을 듯하다. 리턴> 하얀거탑> 무방비도시>
■ '리턴' - ‘수술 중 각성’ 그리고 복수… 꽤 잘빠진 스릴러
시나리오의 밀도와 내러티브의 치밀함. 이런 관점에서 <리턴> 은 올해 개봉된 스릴러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리턴>
영화의 줄기는 '수술 중 각성'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한 나상우라는 남자의 복수극. 최면으로 봉인됐던 고통이 25년 뒤 되살아 나면서, 상우는 자신을 수술했던 의료진들을 하나씩 살해하기 시작한다. 공포의 실체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스릴러의 묘미인 반전이 이 영화에서는 복층적으로 숨겨져 있다. 숨가쁘게 절정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른 전개가 슬그머니 시작된다. 각각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네 명의 주연과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신인 감독의 조합이 불안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꽤 잘 빠진 영화가 나왔다. 9일 개봉. 18세 관람가.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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