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 조선 화사(畵師)들이 신봉했던 지상의 황금명제는 엄정한 사실주의였다.
30여년간 초상화 분야를 연구해온 조선미(60) 성균관대 예술학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가 조선시대 초상화론 12편을 묶은 <초상화연구> (문예출판사ㆍ2만5,000원)를 펴냈다. 중국,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조 초상화가 오로지 실제 인물에 접근하기 위한 사실적 노력에만 극진했음을 분석한 흥미로운 책이다. 초상화연구>
조선시대는 유교 통치 이념에 따른 사묘(四廟ㆍ고조부터 부모까지 4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와 서원에 봉안할 사대부의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다.
당시 초상화 종류로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御眞),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들을 그린 공신상, 덕망과 학식이 높은 원로의 초상인 기로도상(耆老圖像), 여인상, 승상(僧像) 등이 있지만, 그 수효나 예술성 측면에서 시대를 대표한 것은 사대부상이다.
사대부상에 오롯이 압축돼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은 이미지 연출의 의지 없이 한결같이 절제된 표정과 자세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시선은 얼굴의 각도와 똑같은 각도로 처리돼 있고, 손은 가지런히 모은 공수(空手) 자세가 대부분이다.
중국 사대부상이 한 손은 무릎 위에 얹고 한 손은 각대를 붙잡아 자못 자기현시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일본 사대부상이 시선의 각도를 얼굴 각도와 달리해 자유롭게 인물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과는 딴판이다.
심지어 전장을 호령하던 무관들도 문관과 똑같이 점잖은 공수 자세로 가만히 한 곳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중국이 무관 특유의 동적인 자세나 활 같은 지물을 활용하고, 일본이 말을 타고 출전하는 용맹한 모습을 그린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다.
배경 없는 화면에 인물이 한 명만 그려져 있는 것도 조선 초상화의 특징. 인물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양, 기호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나 도구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에 볼 수 있듯 부와 권력, 위엄 등을 고양하기 위해 함께 그려넣는 시립동자나 시녀 등의 삽입도 배제돼 있다.
이른바 화풍이 없다는 것도 남다르다. 조선의 초상 화사들은 모델의 사실적 재현에만 전념, 초상화가와 모델의 개성이 뒤섞이거나 둘 사이에 갈등이 유발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유럽은 물론 일본, 중국의 초상화들도 인상학적 특징들을 강조해 개성과 미학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데 반해 조선의 초상화는 인물에 대한 과장과 변형 없이 대상 인물의 생긴 모습 그대로를 형용한다. 대부분 작가 미상인 조선 초상화의 화가를 추론해내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한 전형성을 띠는 조선 초상화는 묘사의 사실성에서 여타의 초상화를 압도한다. 특히 “수염 묘사는 수염이 난 부위에 먼저 살색을 칠한 후 흑과 백으로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그려 한자문화권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실 재현력을 보여준다”고 조 교수는 분석했다.
조선 초상화의 이 같은 특징은 모두 사묘 봉안이라는 제례적 용도가 조선초상화를 규정짓는 최종심급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사당에 걸리는 초상화는 제사 지내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숭앙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므로 그림 속 인물은 실제 인물을 강력하게 환기시킴과 동시에 자기수양과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어야 했던 것.
렘브란트나 반 고흐의 자화상,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 등에서 보이는 것 같은 내적 정서나 개별적 성정이 조선의 초상화에서는 표출되지 않는 까닭이다. 도쿠가와>
책머리에는 조 교수가 전국을 답사하며 품 들여 한데 모은 한중일 3국의 초상화와 사진 등 291점의 채색 도판이 실려있어 읽는 이의 실감나는 이해를 돕는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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