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변화를 두려워해선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시대에 살아 남기 어렵다.
국내 홈 네트워크 시장을 개척한 변봉덕(69) ㈜코맥스 회장. 홈 네트워크 시장 역사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기업의 성공여부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변 회장은 자신만의 경영 노하우를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코맥스를 국내 홈 네트워크 업계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킨 그에게도 코맥스와 더불어 걸어온 40여년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 실향민의 고행 시작
변 회장의 고향은 평양이다. 일사후퇴(1951년 1월4일) 때 어머니와 함께 5남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가정형편은 넉넉치 못했다. 가족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산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변 회장이 1968년 서울 청계천에 ‘중앙전자공업사’ 간판을 내걸고 처음 시작한 일은 전화기 옆에 부착된 발전기를 돌려 교환원을 호출하는 공전식 전화기 생산 및 판매 사업.
당시만해도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여관과 호텔, 대형건물 등에서 사용하는 공전식 전화기 사업은 발로 뛴 만큼 제법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 줬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약육강식의 시장 논리가 사업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국가 통제 상품인 공전식 전화기 사업에는 엄격한 규제가 따랐고 영업 초기 계약 단계에서부터 로비가 판을 쳤다. 발품 팔아 어렵게 얻은 사업장들도 자금력을 갖춘 경쟁사들에 하나 둘 씩 넘어갔다.
“북에서 내려온지라 요새 말로 돈도 없고 빽도 없었죠. 공전식 전화기 사업으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터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변 회장은 사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 '도어폰' 탄생
그렇게 첫 사업이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우연히 지인에게서 시장개척 단계에 머물러 있던 인터폰 사업을 전해 들었다.
그 때만해도 인터폰은 양쪽에서 수화기를 들고 대화하는 수준이었다. 변 회장에게 이 단점은 오히려 새로운 사업 아이템 창출의 호재로 다가왔다. 인터폰을 각 가정의 출입문 개폐 기능과 연계 시킨 것.
“인터폰을 그대로 우리 전통 가옥에 적용하기엔 불편했습니다.
손님이 올 때 마다 일일이 직접 마당으로 나가 문을 열어줘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인터폰에 출입문 개폐 기능을 보완한 ‘도어폰’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코맥스 창립의 실질적인 근간이 된 도어폰 탄생을 변 회장은 이 같이 설명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1970년대 초 아파트 건설 붐을 타고 도어폰의 수요는 급증했다. 당시 지어진 대부분의 신규 아파트가 이 도어폰을 채택했다. 도어폰 출시 초반 한 때 일부 제품에서 불량품이 발생, 사업 전반에 걸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끝까지 책임지는 애프터서비스’로 이를 극복해 냈다.
확실한 AS업체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회사 매출도 다시 상승세를 탔다. 직원들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낮에 영업을 한 뒤 밤에는 변 회장 자택 마당에서 천막을 치고 야간 포장작업을 했다.
■ "장돌뱅이가 뭣하러 해외에 나갑니까"
내수시장에서의 호황으로 체력(?)을 비축한 변 회장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거래선 확대를 위해서 였다. 그러나 해외로 나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관계당국의 추천을 받아야만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관계당국에) 찾아갔다가 ‘청계천 장돌뱅이가 무슨 일로 해외에 나가려고 하느냐’며 핀잔만 들었습니다. 문전박대도 여러 번 당했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 변 회장의 해외 나들이는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시작됐다. 낯선 땅에서 변 회장 홀로 나선 영업도 녹록치 않았다.
호텔에 머물지 않으면 바이어들이 아예 만나 주지도 않았다. 호텔 숙박비와 교통비를 합쳐 하루에 100달러씩 날아갔다. 끼니는 길거리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핫도그로 때웠다. 출국장에서 환전이 300달러로 제한돼 길어야 2~3일 밖에 머물 수 없었다.
3일 안에 바이어 섭외에서부터 제품 공급 계약까지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변 회장은 더듬거리는 영어 실력으로 일일이 바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영업을 시작했고 이 같은 그의 노력에 해외 바이어들은 연이은 주문으로 화답했다. 중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수출과 내수 비중을 적절하게 분배한 덕에 변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의 ‘칼바람’도 비켜갈 수 있었다.
■ 변신은 무죄
변 회장은 요즘 ‘홈 네트워크 시스템‘ 분야에서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각 가정의 모든 가전 제품을 통합해서 관리하는 홈 네트워크 시스템 쳄揚?최근 급속도로 그 규모가 확장되고 있다.
개성공단 토지를 2억5,087만원을 들여 50년간 임차해 생산시설 확충에 나선 것도 홈 네트워크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칠순을 앞둔 나이지만 변 회장은 어김없이 매일 아침 7시에 회사로 출근, 제품 개발을 포함해 마케팅 전략 기획 등을 놓고 임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젠 홈 네트워크 시장도 편안함과 안락함이 어우러진 감성 중심의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그는 변신을 꿈꾸고 있다.
성남=허재경기자 ricky@hk.co.kr
■ '코맥스' 해외에서 더 유명한 '글로벌 기업'
1968년 중앙전자공업사로 출발한 코맥스는 도어폰과 비디오도어폰 개발에 성공하면서 국내 홈 네트워크 분야를 개척했다.
코맥스는 이어 화재와 가스누출 감지, 방범 장치 등을 제어하는 홈 오토메이션 시스템을 선보이며 국내 홈 네트워크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1973년 미국과 영국 등에 처음으로 도어폰을 수출하기 시작한 코맥스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수출전선을 확대, 현재는 100여 개 국가에 자체 브랜드를 부착한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 내수보다는 수출 비중이 높다. 때문에 코맥스는 국내 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국ㆍ내외 시장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세에 힘입어 코맥스는 2000년 코스닥 등록을 성사시켰다. 2004년에는 5,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최근 들어 코맥스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대비, 주력 사업을 홈 오토메이션에서 웰빙 생활과 연계된 홈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전환 중이다. 이를 위해 부설연구소 연구원과 영업 인력을 홈 네트워크 사업 분야로 대거 전진배치했다.
코맥스는 브랜드 경영에도 힘을 쏟고 있다. 홈 네트워크 시장이 기업간 비즈니스에서 일반 소비자 대상으로 확대되면서 감성 마케팅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맥스는 3년 여에 걸쳐 ‘블루밍 라이프’라는 전용 브랜드를 개발, 각종 광고와 전시물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코맥스는 고객 맞춤형 홈네트워크 포털 서비스인 ‘홈이’(Homⓔ)를 구축, 운영하고 있다. 홈이는 인근 지역 상가 세일 및 행사 내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정보검색과 주문 내역을 바탕으로 가구별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아울러 코맥스는 올해 해외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설 예정이다. 30년 넘게 축적된 영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코맥스는 유럽을 포함해 북미와 남미 지역 등에 홈 네트워크 시스템을 공급함으로써 수출 전선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허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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