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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박사 58주기 참석차 방한 외손녀 주디 애덤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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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박사 58주기 참석차 방한 외손녀 주디 애덤스씨

입력
2007.08.0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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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부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다며 흥분한 적도 있지요.”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애쓴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 선생의 58주기 추모식이 3일 고인이 묻힌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열렸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이 헤이그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한지 100년이 되는데다 헐버트 선생 역시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됐기 때문에 올해 추모식은 더욱 뜻 깊었다.

추모식에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초청으로 외손녀 주디 애덤스(85) 여사가 참석, 유족 인사를 하고 헌화했다. 애덤스 여사는 “할아버지가 타계한지 58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매년 추모 행사를 열어주어 추모사업회와 한국민에게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아리랑이 연주되자 “열세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어머니가 평소 부르던 멜로디라 귀에 익고 가슴이 뭉클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애덤스 여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헐버트 선생이 방한해 타계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그는 “밤마다 한국의 동화 등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자상한 할아버지로 헐버트 선생을 기억했다.

하지만 정작 정치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는데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버몬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헐버트 선생은 1886년 유니온신학교 재학 중 왕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5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893년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와 <코리아 리뷰> <대한제국멸망사> 등을 출판하며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알렸다. 조선 청년에게 근대사회개혁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한국YMCA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빼앗는 등 식민지화를 추진하자 고종은 그를 워싱턴에 밀사로 파견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에도 파견됐는데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본이 압력을 넣자 미국 정부가 소환하는 형식으로 이듬해 한반도를 떠났다.

헐버트 선생은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40여년 만에 방한했으나 고령에 여독이 겹쳐 서울 위생병원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장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지에 따라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3일 추모식에는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 김국주 광복회장, 신영섭 마포구청장, 주한미대사관 관계자, 제프리 존스 주한 미 상공회의소 명예회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애덤스 여사는 이날 고종이 1909년 10월 할아버지에게 보낸 서신과 할아버지가 1948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 등 유품을 기념사업회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범수 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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