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왕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역사의 여백으로 남아있던 고려궁성의 구조가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1일 “남북 공동 발굴조사단이 5월18일~7월13일 북한 개성시 송악동 고려궁성의 서편 일대 3만㎡(약 1만평)를 시굴한 결과, 최대 길이 250m에 이르는 대형 축대 4곳과 29동의 건물터,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기와 생산지와 생산자를 표시한 명문(銘文)기와와 전돌, 도자기 등 800여점의 유물도 출토됐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인 919년 수도 개경(개성)에 창건한 고려궁성은 네 차례에 걸쳐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며 443년간 고려 왕조와 영욕을 함께 해왔다. 거란의 침입(1011년), 이자겸의 난(1126년), 화재(1171년과 1225년) 등으로 소실됐던 궁성을 왕조는 그때마다 품 들여 중건했다.
그러나 공민왕 11년(1362년) 홍건적의 난으로 스러진 후 궁성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새 왕조는 한양으로 천도했고(1392년), 고려왕궁의 옛터는 과수원과 텃밭으로 사용되며 미지 속으로 사라져갔다. 흔히 고려왕궁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 만월대(滿月臺)는 본래 정전 앞 계단을 가리키던 것으로 고려궁성이 폐허로 변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번 공동발굴은 북한이 추진 중인 개성역사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하고, 고려궁성의 역사적ㆍ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남측에서는 남북역사학자협의회와 문화재청, 북측에서는 민족화해협의회와 문화보존지도국이 조사기관으로 참여했으며, 경복궁의 절반 정도 되는 총 7만5,000평의 궁성터 중 1만평을 위와 아래로 나눠 위쪽은 남측이, 아래쪽은 북측이 시굴했다.
이번 발굴의 가장 큰 성과는 조사지역 내 유구(遺構ㆍ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보여주는 자취)의 평면 배치 형태를 확인한 것. 특히 ‘가-1호’로 명명된 건물지는 지금까지 확인된 건물 중 가장 권위 있는 건축물로 고려 궁성의 정전(正殿)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과 서쪽에 204㎝의 축대를 쌓아 부지를 조성한 뒤 중앙에 동서 31.8m, 남북 13.4m에 이르는 평면 亞자형 대형 건물을 배치했으며, 건물지 전면 중앙에서는 3개로 추정되는 계단 시설이 확인됐다.
‘나-17호’ 건물지는 5개의 예단(禮壇) 기초시설이 확인된 것으로 미루어 문헌기록에 5대왕의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나오는 제례공간, 경령전(敬靈殿)일 것으로 추측됐다. 동서 47m, 남북 13.7m 규모인 ‘나-1호’ 건물지는 북쪽 중앙에 亞자형 건물을 배치하고 그 전면에 이중 회랑으로 안뜰을 둔 점으로 미루어 생활공간인 편전(便殿)이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번 발굴로 문헌에 간헐적으로 언급된 고려왕궁의 구조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다”며 “조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고려사 연구에 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남북 공동 발굴조사단은 8~10월 나머지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행할 계획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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