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교회 권력과 신학 도그마 탓에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세상에 나왔다. 어느 시대에도 궤변은 필요하다… 이 사회를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는 날까지는, 나는 이 책이 가설인 것으로 만족한다.”
1974년 봄, 리영희는 한 권의 논문집을 내며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새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차갑게 빛나는 한 다발의 지성을 토해 내며 그것을 ‘가설’이라 규정했다. “‘괴(傀)’자 같은 비과학인 감성적ㆍ정치적 목적의 용어”를 써야 하는 “시대적 도그마와의 타협”이 이유였다.
1970~1973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정경연구 등에 기고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관한 글을 엮은 책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라 이름 붙인 이 책이 어떤 무게를 갖게 될지, 자괴감 섞인 서문을 쓰던 마흔 다섯의 해직 기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전환시대의>
책이 씌어지던 무렵 군사분계선 이남의 공화국은 유신(維新), 곧 군사정권 영구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하고 중국 대륙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한국인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한반도 상공에도 냉전체제 와해, 신질저 구축의 새로운 공기가 흘러 들었으나 그 풍향을 짚어 줄 사람은 없었다.
침묵하는 지식인들은 어둠 속에 자취를 찾기 힘들었고, 정권의 검열을 거친 언론은 오히려 눈을 흐리게 하는 백태였다. 이때 해직 기자이자 해직 교수인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실체규명에 도전하고 나섰다. 벼린 날 같은 시각으로 동북아 정세를 꿰뚫는 ‘논리’는, 몽롱한 의식에 내려 치는 한 바탕 벼락이었다.
충격의 크기는 깊고 넓었다. 이 책은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체화한 냉전의식의 피부를 걷어 내는 수술용 칼이었다. 이 시기 대학 초년생이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지식을 보태 주기에 앞서, 진실로만 알고 있던 상식이 허구로 무너지는 괴로움을 먼저 맛보여 줬기 때문이다.
책은 젊은 지식인 사회와 대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며, 자연스레 ‘전론(轉論) 세대’를 형성했다. 남한 사회의 상투적 의식체계를 깨우는 각성제로 작용하다가, 이내 독재권력의 심장을 뚫는 무기가 됐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유신교육으로 인한 냉전적 사고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
유신 말기, 젊은이들이 비판의식을 세례받는 현장에는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뒤늦게 이 책을 금서(禁書) 목록에 추가한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은 내용상 6부로 구성돼 있지만, 평론집인 만큼 하나의 줄기를 이루지는 않는다. 중국과 일본의 정치역학,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다.
중국에 관한 논문을 모은 2부는 국공합작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개입,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과도 집단지도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인해전술의 기억과 ‘죽의 장막’이라는 신화 너머에 있던 대륙이, 리영희의 날카로운 분석 앞에 생생한 속살을 드러내야 했다.
일본을 다룬 3부도 마찬가지다. 일본 자위대의 외부지향적 구조를 통해 군국주의 부활 의도를 읽어내고, 미국과의 밀월관계 분석에서 아시아에서의 일본 역할론을 정확하게 짚어 낸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4부에 포함된 베트남 전쟁 분석. ‘월맹군의 침략’과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기존의 냉전 논리는, 베트남의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리영희의 치밀한 재구성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
통킹만 북폭 사건과 미국의 사전 계획으로 인한 전면전 확대 등,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베트남전의 본 모습이 이 책에서 까발려진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미국의 혈맹으로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이 대목은 오랫동안, 이 책에 ‘이적표현물’의 타이틀을 씌우는 근거가 됐다.
<전환시대의 논리> 가 이처럼 동북아 정치역학을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외신부 기자로서 리영희의 경험이 있었다. 이 책의 근거가 된 텍스트들은 정치학 원론서가 아니다. 전환시대의>
국제정세와 관계된 각종 외신 기사, 미 국무성과 국방성의 비밀 자료와 의회의 공청회 기록, 일본과 중국 외무성의 성명이나 연설 자료 등이 ‘논리’를 세우는 뼈대였다.
기자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들었던 각종 자료와 그것을 꼼꼼히 수집, 정리한 리영희의 집념이 이 책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70년대 리영희의 서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윤무한 강원대 교수는 “서재를 빽빽이 채? 누런 포장용지를 접고 자르고 구멍을 뚫고 풀로 붙여 만든 스크랩북들이 청동기시대의 유물 같았다”고 기억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뀐 오늘, 이 책은 여전히 ‘전환시대’의 해석으로 유효할까. 지난해 초 31년 만에 찍은 2판 서문에 리영희는 다시 이렇게 썼다. “피를 먹고 싹을 튼 한국의 민주주의 나무는 그 앞날이 결코 순탄치는 않겠지만 힘있게 자라서 넓은 번영의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십만을 헤아리는 전국의 ‘전론’의 사상ㆍ정신적 제자들이 사회와 나라의 주인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 리영희, 결코 꺾이지 않았던 '펜'
"리영희! 그는 한반도 상공에 날고 있는 각성의 붕(鵬)이다."
지난해 여름, 한길사에서 묶어 낸 12권짜리 <리영희 저작집> 에 부치는 시인 고은의 서사(序辭) 한 토막이다. 세상은 그에게 '시대의 양심', '행동하는 지식인'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하지만 그는 학자(또는 운동가)라기보다는 기자다. 다만 그 시각의 수승(殊勝)함과 논리의 정치함이, 어떤 이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케 했고 다른 이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쳐졌을 뿐이다. 리영희>
리영희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자 경력은 순탄치 못했다. 64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검토중'이라는 기사로 처음 구속(반공법 위반)된 뒤, 72년까지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다음 직장인 대학에서도 두 번 쫓겨나는 경험을 했다.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1,012일에 걸친 영어(囹圄)의 시간을 거치며 "나의 글들이 이 사회에서 하루 속히, 읽을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 돼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하지만 기자 리영희 앞에 우상(偶像)은 건재했고, 그의 펜은 마를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 사회의 허위의식을 벗겨내는 고통을 얘기하며 자주 루쉰(魯迅)의 글을 인용했다. "햇볕도 공기도 안 들어오는 무쇠로 만든 방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 주는 것은 옳은 일일까. 감각이 마비된 탓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힘을 주는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이 아닐까." 그는 결국 군사정권이 쳐 놓은 허위의 은산철벽에 진실의 구멍을 뚫는 길을 선택했다.
그 각성의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음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등 그의 언어는 아직도 성성하다. 유상호기자
■ 리영희
-1929년 평북 운산군 출생.
- 47년 경성공업교 졸업.
- 50년 한국해양대 졸업. 육군 입대.
- 57년 소령 예편. 합동통신사 입사.
- 64년 조선일보 입사. 반공법 위반 구속.
- 70년 위수령 항의 성명 참가로 강제해직.
- 72년 한양대 교수직 강제해직.
- 74년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전환시대의>
- 77년 <우상과 이성> 출간. 반공법 위반 구속. 우상과>
- 80년 만기출옥. 광주항쟁 배후로 지목돼 구속.
- 88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취임.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 90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출간. 새는>
- 95년 <8억인과의 대화> 출간. 한양대 정년퇴임.
- 99년 <반세기의 신화> 출간. 반세기의>
-2005년 <대화> 출간. 대화>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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