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신경숙
오늘 새벽에 스물아홉 살의 한국인 청년이 또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순차적으로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어이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구나 싶은 절망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피살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겠지요? 장대같은 아들의 피살 소식을 듣고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얼굴을 감싸고 우는 그의 어머니 모습도 생각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가 어떤 인간이든 어떤 가치 기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았든, 당신들은 상관 안 하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에게 피살될 위협에 놓여 공포에 떨고 있을 인질들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 절망과 좌절을 뚫고 그래도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는 것, 그것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니… 너무나 곤혹스럽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인류의 삶이 이 지경으로 극단적인 분쟁에 휘말리고 그것과 관련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이 담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나는 민간인을 납치하고 그들을 해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당신들이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게도 어떤 상황논리는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들 인간이 그 상황논리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이리 흔해진다면 앞으로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 정말 난감합니다.
이슬람 경전도 인간적인 삶을 위해 생겼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근본이 그러하듯 무슬림의 엄숙하고 경건한 율법 속엔 분명이 약한 자를 해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도우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을 겁니다.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버렸는지를 생각해봐 달라고 하는 나의 청이 얼마나 무력한 호소인지도 압니다.
그런데도 해야겠습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 탄 듯 내릴 길이 없이 달려야만 할 때는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슬림의 근본을 생각해 주십시오. 언젠가 여행길에 당신들의 라마단의 숭고한 의식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한 달을 온 몸을 깨끗이 하고 음식을 금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일 없이 행동을 바르게 하는 최상의 상태에서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라마단의 의식에 무슬림의 근본이 있지 않습니까.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학생이 원 뜻이었다는 탈레반이 그 처음의 뜻을 잃고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도 한 번 생각해봐 주십시오.
탈레반 앞에서는 어떤 노력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라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약자인 인질들을 귀환시켜 주십시오. 누구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공포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들에게 내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고 절망하면서도 이와 같이 말을 붙여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십시오. 그 희망을 보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일에도 섣불리 절망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신경숙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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