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둘 곳 없어 부유하던 여인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저 높은 곳, 팜트리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흩어진다. LA의 겨울 공기는 차갑고 메마르다. 부서진 햇살은 응결하지 못하고 스크린 속으로 쏟아진다.
#2. 햇살이 비치는 창을 배경으로 여인이 서 있다. 기쁜 약속이 있는 듯, 이리저리 옷을 고른다. 하지만 꽃을 든 남자에게, 끝내 말을 건네지 못한다. 둔탁한 네온사인 거리를 지나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기다리는 남자의 방으로 향한다.
#3. 만년설이 덮인 알래스카로 한 여인이 흘러 온다. 알코올이 스민 그녀의 눈에 한 마리 순록이 꿈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고요한 숲 속에서 더 고독한 여인은,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오로라를 품으러 달려간다.
2일 개봉하는 <허스(hers)> 는 앵포르멜(비정형) 회화 같다. 골격은 미국 땅에 사는 한국계 창녀 세 사람의 이야기. 하지만 지극히 신파적인 소재에 놀랍도록 추상적이고 섬세한 감성의 옷을 입혔다. 허스(hers)>
‘몸을 팔아’ 배를 채워야 하는 여인의 눈에 고인 것은 만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 어디선가 헤어진 자기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영화는 여인들이 겪는 고통의 현실적인 감촉을 전하는 데 관심이 없다. 채울 길 없는 고독의 무게를 은유적으로 느끼게 해 줄 뿐이다. 고독감은 세 여인 사이를 떠돌다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이된다.
영화에는 세 명의 ‘지나’가 등장한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인 지나의 세 가지 분리된 기억일 수도 있다. 20대의 지나(김혜나). 매춘조직에서 막 탈출한 그녀는 아이스크림 몇 개에 공원 화장실에서 다시 몸을 내준다.
한국계 경찰이 마련해준 시체 영안실 같은 창고에서 꿈같은 안식을 맛본다. 그러나 그것은 신기루처럼 형체가 없다. LA의 하늘을 향해 맑은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도시는 대답이 없다.
30대의 지나(엘리자베스 바이스바움). 건조한 라스베이거스 콜걸인 그녀 가슴 한편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이 있다. 그리고 익명의 연인 K가 있다.
지나는 그 ‘익명’의 신분을 알게 되지만, 그에게 다가설 수 없다. 40대의 지나(수지 박). 퇴기(退妓)의 냄새를 숨길 수 없는 그녀는 알래스카로 간다. 누가 봐도 생의 마지막 자리를 찾아 떠도는 순례자의 모습. 흑백만이 존재하는 오로라의 숲, 환희와 절규가 뒤섞인 목소리가 새벽 속으로 비산한다.
영화의 매력은 몽환적 느낌의 미장센, 그리고 그것이 표현하는 입체적인 고독감이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두 한국계 여배우의 농밀한 연기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이 데뷔작인 김정중 감독은 시(詩)의 압운을 두듯, 강약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인다.
소재에 비해 표현양식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영화가 구상화의 필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모호한 어디쯤에, 그 풍경을 그려 놓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흐름’ 부분에서 ‘JJ Star상’을 수상한 작품. 18세 관람가.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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