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이 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창당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파 간 지분 싸움에 매몰되면서 정작 신당의 정체성과 노선에 관한 논의는 뒷전이다. 이대로라면 신당의 외피를 쓰더라도 '열린우리당의 아류(亞流)'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신당 창준위는 5일로 예정된 창당대회를 불과 닷새 남겨둔 31일까지 정당의 기본이랄 수 있는 정강ㆍ정책과 당헌ㆍ당규에 대한 논의를 단 한 차례도 하지 못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진영 사이의 치열한 지분 싸움 때문이다. 이날 오후 집행위원장단을 비롯해 창당기획, 조직, 정강ㆍ정책, 당헌ㆍ당규 등 8개 실무기구의 위원장단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게 의외일 정도다.
물론 각 분과위마다 우리당 탈당파, 통합민주당 탈당파, 시민사회진영이 공동위원장을 맡는 전형적인 '나눠먹기' 인선이었다. 그나마 정치권 전체와 1 대 1 지분을 요구했던 시민사회진영이 명단 제출을 미루면서 이름이 아닌 '미래연대'로 일괄 표기된 채 인선안이 발표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정치권은 정치권 2개 그룹과 시민사회진영의 지분을 1 대 1 대 1로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새로 창당될 정당이 국민에게 제시할 비전과 노선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고 있지 못한데도 상당수 정치권 인사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3일 중앙위원ㆍ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정강ㆍ정책과 당헌ㆍ당규가 최종 확정돼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대 시간이 부족하지만 이들은 여유만만이다.
이와 관련, 창준위의 정치권 핵심인사는 "현존하는 정당 가운데 우리당의 강령과 당헌이 가장 선진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며 "다만 기간당원제를 근간으로 한 조직 노선 부분은 손을 좀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우리당의 정강ㆍ정책과 당헌ㆍ당규를 거의 그대로 승계하는 쪽으로 가게 될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 재선 의원은 "신당 참여 세력 사이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성장과 분배, 상향식 민주주의의 제도화 등에 대한 이견이 뚜렷한 건 부인할 수 없다"며 "추상적인 문구만 조정하는 식으로 지나가면 결국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우왕좌왕했던 우리당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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