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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최초 우승 '하나된 이라크' 신화를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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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최초 우승 '하나된 이라크' 신화를 쐈다

입력
2007.07.3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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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축구대표팀이 전쟁과 테러로 갈가리 찢진 조국에 희망을 선물했다.

29일 저녁 아시안컵 결승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이라크 전역은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남부 바스라에서 북부 모술까지 거리는 수만 명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기적 같은 2007 아시안컵 우승을 자축하는 기쁨의 소리였다.

모처럼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이 어깨를 맞대고 이라크 국가를 노래했다. 일부는 웃옷을 벗어 던진 몸에 적백흑 3색 국기를 그려 넣고 ‘이라크 만세’를 외쳤고, 군대와 경찰까지 총을 쏘아대며 승리에 열광했다. 2004년 그리스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4강에 오른 지 4년 만에 다시 축구로 하나가 된 이라크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예상 못한 승리는 정치인들도 해내지 못한 ‘하나된 이라크’의 신화였다. 축구대표팀 22명 대부분은 시아파 출신이다. 그러나 이날 사우디 아라비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스트라이커 유니스 마흐무드는 수니파, 또 그의 머리를 향해 공을 날린 말라 모하메드는 유일한 쿠르드족이다.

현실의 종파ㆍ인종 분쟁이 내전위기를 가져온 것과는 반대로, 축구의 종파ㆍ인종 화합이 아시아를 제패한 것이다. AP통신은 “정치인들이 우리를 분열시켰고, 축구선수들이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는 한 바그다드 시민의 말을 전했다.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의 사자들(The Lions of the Two Rivers)’의 별명을 지닌 대표팀이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감독자리는 죽음 위협 때문에 3명이 잇달라 고사하면서 대회 2개월 전에야 간신히 확정됐다.

브라질의 요르반 비에이라가 2개월 계약으로 감독을 맡았으나 선수를 단련시킬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표팀 첫 소집 때 겨우 6명이 참석할 정도로 선수 간 갈등은 극심했다. 안전문제로 이라크를 떠나 요르단과 한국을 오가며 눈치훈련을 했다.

막판에는 경비도 마련치 못해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5만달러를 지원받아 대회에 출전했다. 비에이라 감독조차 “우리가 승리하면 이는 인샬라(신의 뜻대로)”라고 했다.

선수들 모두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대회 도중에도 선수 2명이 테러로 가족을 잃었다. 상당수 선수들은 얼마 전까지 고문과 투옥을 당했다.

사담 후세인 집권 시절 그의 아들 우다이는 대표팀이 경기에 지면 선수들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고 구타를 가했다. 전기고문과 수감생활을 참다못해 은퇴를 선언한 선수는 이를 번복할 때까지 맞았다. 경기 뒤 비에이라 감독은 “이런 수많은 역경을 헤쳐온 선수들에게 오히려 내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승리의 공을 돌렸다.

통합이 일궈낸 이번 우승에 대해 정치적 해석도 뒤따른다. 시아파는 수니파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사우디를 상대로 승리한 것을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 일부세력은 “이번 승리는 이라크의 승리이며, 미군 철수는 더 큰 승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축구의 정치학’에 실망한 유니스 선수는 신변위협을 이유로 귀국 환영행사에 불참을 선언했다.

이날 승리를 자축하는 총탄에 맞아 7명이 죽고 50여명이 다쳤으나, 환영인파를 겨냥한 폭탄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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