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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3> 서로 "보따리를 먼저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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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3> 서로 "보따리를 먼저 풀어라"

입력
2007.07.3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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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사업 제1차 예비회담 제1차 회의가 5월 14일 오전 9시30분 베이징(北京)의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 14호각 1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한중 두 나라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1차 회의는 양측 수석대표의 기조연설로 막을 올렸지만 접근 방법은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수석대표 장루이지에(張瑞杰)대사는 한 장으로 된 자료만 갖고 테이블에 앉았다. 우선 환영의 말에 이어 양국 외상의 합의에 따라 비밀회담을 갖게 되었고 유익한 성과를 기대한다는 말로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면서 중한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해 각기 원칙적 문제와 의견을 개진하자고 강조했다.

짤막한 인사말에는 ‘수교’라는 단어는 없고 대신 ‘중한관계 가일층 발전’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한국측이 먼저 보따리를 풀어보라는 은근한 접근법을 택했다. ‘중국식 초대’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조연설문’과 ‘제 1차 예비회담 대책’, 그리고 참고자료 등 두툼한 자료를 앞에 놓고 기조연설문을 토대로 하되 즉석에서 상황에 따라 발언을 했다.

한국측 발언. 한중수교문제를 본격 논의하기 위해 예비회담을 열게 된 것은 양국관계에 있어서 역사적인 일이다. 장 대사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중한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는 문제’는 바로 ‘한중수교’이다.

유엔헌장의 제원칙에 따라 아무 전제조건 없이 수교가 조속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나는 처음부터 수교라는 핵심을 직접 겨냥했다). 한국과 중국이 금세기 초 관계가 단절된 이래 80여년 간 비정상적 관계가 이어져온 것은 서로 불행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국제정세는 새로운 시대를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이제 양국관계를 하루 속히 정상화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번 수교교섭회담을 시작으로 양국관계가 조속히 정상화되어 이웃으로서 전통적인 선린우호협력 관계를 회복하고 다가오는 아시아ㆍ태평양시대에 대비하여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공동번영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기를 바란다.

한국측은 전제조건 없는 수교를 조속히 하자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이번 회담을 통해 양측이 앞으로 ‘국교정상화에 관련된 문제’와 ‘기타사항’에 대해 상호이해와 호혜평등의 바탕 위에서 의견교환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측은 수교를 추진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생각하며, 수교교섭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중국측 발언. 방금 권 대사가 관계정상화에 아무런 전제조건이 없고 협상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 발언에 찬성한다. 두 나라 관계발전을 위해 몇 가지 문제를 먼저 제기하겠다. 중국은 한반도 정세안정에 관심을 가져 왔다. 한반도 정세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한 기본 합의서 및 비핵화 공동선언은 새로운 진전이다. 이러한 진전은 남북한 대립과 격리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관련 국가들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했다.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상황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형 선수단을 파견했다. 1988년부터 직접교역을 시작했고 1991년 무역대표부를 상호교환 개설했다.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 때 노태우 대통령을 면담하고 이상옥 장관이 베이징에서 개최된 유엔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사회위원회(ESCAP) 총회 때 리펑(李鵬) 총리를 면담한 것은 한중관계에 밝은 전망을 열어 놓았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중한 관계의 발전은 가일층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에 유리해야 하며, 남북한 쌍방의 관계 개선과 최종 통일의 실현에 유리해야 한다.

아울러 북한과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추진에도 유리하길 바란다. 이는 중국인민과 한국인민의 이익에 부합할 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평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을 다 할 생각이다.

나도 즉석에서 화답했다. 한반도 정세관과 국제 정세관에서 한중 양측의 인식이 대체로 일치한다고 장 대사의 발언에 동의했다. 아울러 그러한 기초 위에서 목표 실현을 위해 노력을 다 하겠다는 것은 중국 정부의 위대한 결단이라고 못을 박았다.

장 대사 역시 한중관계 발전에 관한 희망과 생각은 같다고 전제하고 이번 비밀접촉을 통해 쌍방의 메시지와 견해를 상부에 보고하자고 제의했다.

이어 이러한 기초 위에서 쌍방관계 발전을 위한 나의 구체적 견해를 알려주기 바란다고 결론을 내렸다. 장 대사는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도 한중관계를 꿰뚫어 보고 내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암중모색하던 한중수교의 과녁에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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