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말투와 정치적 복선 등이 거슬려서 그렇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려온 차기 지도자 모델은 수긍할 대목이 적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먹고 사는 일이 피곤하고 살림살이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다 보니 은연중'경제대통령 대망론'이 사람들의 뇌리에 스며들었지만, 그 실체를 하나씩 따지고 들면 공허하고 심지어 우습다는 것이다.
"실물경제 좀 안다고, 경제공부 좀 했다고 경제 잘 하는 게 아니다. 시대정신이 경제라고 하는데 (대선후보들 간에) 경제정책의 차별성이 뭐 있느냐.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사회복지 민주주의 인권 문제로 대선 전선이 이뤄지는 게 도리다."
하기야 그렇다. 유력 후보군들이'7ㆍ4ㆍ7'이니,'줄ㆍ푸ㆍ세'니,'실ㆍ사ㆍ구ㆍ시'니 하며 재치있게 공약을 포장했으나, 경제에 관한 한 각각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결국은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어 성장률을 높이고 고용과 소득을 증대시켜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대통령의 말은 더 확대된다."역사를 돌이켜보면 국민에게 행복과 영광을 준 지도자는 단지 경제만 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거시적 관점에서 철학과 통찰력을 갖고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하고 미래를 준비한 지도자였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지도자는 경제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반성장 균형발전 사회투자와 같은 새로운 전략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노 대통령 '지도자론'재부상
이런 말에서 특정 후보를 겨냥한 독기와 업적을 과장하는 치기만 빼면, 지도자론으론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다. 복잡한 세상 일에서 경제만 달랑 떼어내는 작업 자체가 가능하지 않고,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국정의 총합체인 경제를 잘 꾸리겠다는 발상은 착각이거나 오만일 것이다.
참여정부와 대비해 분배보다 성장에 치중하겠다는 뜻으로 경제대통령을 말한다면 그나마 이해는 되지만, 역대 선거에서 보듯 그것은 아무나 내세우는 보통명사일 뿐, 특정 후보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재계, 그 중에서도 대기업을 대표하는 전경련의 조석래 회장이 엊그제 "다음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미래 한국 비전과 차기 정부 지도자에게 드리는 제언'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강연을 통해서다.
정부는 국민을 어린애 취급하며 행정 편의주의와 특정 이익집단 위주로 일을 처리하고, 정치권은 이합집산과 비방ㆍ탈당ㆍ합당을 거듭하는 사이에 경제가 망가졌으니, 차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기업이 신바람나게 사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정부가 기업에 투자하라고 명령하면 기업이 다 들어주던 제왕적 정치시대는 갔다는 말도 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지 말라는 조 회장의 뜻은 알겠고 좋은 건의도 많이 했다. 하지만'그 놈의'정부와 정치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편향적 인식과 기업 지상주의가 바탕에 깔린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자꾸 옛날 일을 들추면 사실 답이 없다"며 기업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려던 뜻이 "시골에 땅 좀 샀다고…"하며 사돈관계인 이명박씨 관련 의혹을 감싸는 듯한 발언으로 빗나가는 바람에, 엉뚱한 파문을 낳고 재계가 곤혹스러워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인식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잘못된 지배구조나 의사결정방식, 제왕적 영업행태 등은 새삼 거론할 것도 없다. 대한상의의 최근 조사에서 국민들의 기업호감도가 작년보다 더욱 나빠지고, 얼마 전 중소기업 대표들이 공룡재벌들의 횡포 때문에 생존을 위협 받는다며 공정거래위원장에게 대책을 하소연한 것만 봐도 전경련 대표가 큰 소리칠 상황이 아니다.
● 기업 지상주의 함정 경계해야
사정이 이러니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게 해 달라는 국민들의 바람과 기업이 활개치고 놀 마당을 만들어 달라는 재계의 요청 사이엔 틈이 벌어지고,'비경제'대통령 입에서 "실물경제 좀 안다고…"라는 막말과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자찬이 쏟아지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시장과 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열린 안목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요즘 각광 받는 유럽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잘 분석해보면, 재계가 마구 쏟아내는 경제대통령론은 참으로 옹색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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