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21일과 2007년 7월 27일.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고 김선일(당시 34세) 씨 사건을 취재하면서 다신 이런 일이 없으리라 희망을 가졌었다.
정부 최고위층 인사들이 김씨 부모의 손을 잡고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 약속하는 장면을 보며 ‘그렇게 되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인 23명이 아프가니스탄 무장세력 탈레반에 납치됐다는 소식에 기자는 희망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희망은 허사였다.
국민 생명 보호에 만전을 기하겠다던 정부 약속은 허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일방적으로 무장 납치세력에 끌려다니는 정부 모습을 보며 피랍자 가족들은 꽉 막힌 가슴 위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3년 전 고 김선일 씨의 부모와 여동생이 고통에 절규하며 흘렸던 그 눈물을…
#1. 2004년 6월 21일
한국인 남성 1명이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됐다는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내달은 고 김선일 씨의 본가인 부산 동구 범일6동 안창마을.
김씨의 아버지 김종규(72)씨와 어머니 신영자(62)씨는 기자를 붙잡고 아들의 납치가 사실인지 물었다. “얼마 전까지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라며 반신반의하던 부모들은 피랍이 사실로 확인되자 주체 못할 슬픔에 땅을 쳤다.
피 말리는 하루를 보낸 김씨 부모는 다음날 “외교부에서 협상 중이니 기다려 달라는 것 외엔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의 묵묵부답 속에 김씨는 끝내 무장단체가 제시한 시한(22일)이 임박해 살해됐고 시신은 길가에 무참히 버려졌다.
‘김선일씨 안전 확인’ ‘곧 석방 될 듯’ 등의 일부 외신 보도에다 정부도 김씨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보도내용을 확인시켜 준 직후의 일이라 가족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으레 그렇듯 빈소에는 정치인들의 ‘선착순’ 눈 도장 방문이 이어졌다. 지금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눈물을 흘렸고, 신기남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 김근태 상임고문 등도 가족을 위로하며 대책 마련 등을 거듭 약속했다.
최악의 상황에 몰려 경질설까지 나왔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UN 사무총장)도 가족들의 분노를 온 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빈소 한 켠에 놓여있던 노무현 대통령의 조화는 찢기고 널부러졌다.
#2. 2007년 7월 27일
그로부터 3년여 후. 기자는 다시 피랍자 가족들의 비통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숯덩이로 변한 가족들의 비통한 심정, 무장 납치단체 탈레반의 협상 전술ㆍ전략에 농락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정부의 무능함, 엇갈린 외신 보도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무엇하나 딱 부러지게 상황을 설명 못하며 허둥대는 정부 모습, 피랍자 가족을 두번 울리는 일부 네티즌의 도를 넘는 사이버 테러, 정치인들의 생색내기 용 피랍자 가족 위로방문, 끝내 사막 한 가운데 도로 변에 버려진 배형규 목사의 싸늘한 주검…. 김씨 사건 이후 그토록 철저히 철저히 다짐했던 정부의 재발 방지 노력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슬람권 국가에서 발생하는 피랍사태에 두 눈 멀고, 두 귀가 막힌 정부. 그리고 희생자 영정 앞에서만 위로와 재발 방지책 마련을 약속하곤 금새 망각해버리는 정치인. 아프간 피랍자 사태가 설령 해결된다 한들 정부의 정치인의 고질병이 고쳐질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