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물로 내놓은 지난해 봄, 국민은행과 하나금융지주의 양강 구도로 전개되던 인수전에 돌연 DBS라는 낯선 이름이 끼어들었다. '싱가포르개발은행'을 의미하는 이 금융회사는 등장 배경을 놓고 '론스타 들러리' 등의 다양한 해석을 낳자 CEO가 직접 서울을 방문해 "아시아 은행연합체를 만들겠다"며 인수의도를 밝히는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하지만 DBS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가격 등 인수조건도 맞지 않았지만, '비금융회사는 국내은행을 인수할 수 없다'는 은행법에 따른 DBS의 적격성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된 까닭이다.
▦ 분명히 은행인데 은행자격에 논란이 있다니, 무슨 연유였을까. DBS 지분의 28%를 보유한 최대주주 '테마섹(Temasek)', 정확하게는 '테마섹 홀딩스'가 걸림돌이었다. '바다의 마을'을 뜻하는 싱가포르의 옛 지명을 차용한 이 회사가 국영 투자회사여서, DBS도 순수한 금융회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름이 생소하고 정체도 불분명한 테마섹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별로 즐겁지 못한 계기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명성과 위상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돼 있으며, 오늘날 싱가포르의 힘을 말할 땐 테마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 테마섹은 정부 지분이 20% 이상인 싱가포르 기업을 관리하기 위해 100% 정부출자로 1974년 설립된 지주회사다. 리콴유 전 총리 시절 만들어진 이 회사는 금융 통신 항공 항만 등 주요 공기업 22개를 거느리며, 1980년대 후반부터 외환 연기금 오일머니 등 수천억 달러대의 정부 여유자산으로 글로벌 인수ㆍ합병(M&A) 대열에 뛰어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싱가포르 투자청이 해외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단기상품에 투자하는 것과 구별된다. 테마섹은 2002년 이후 '글로벌 금융제국'를 표방하며 해외은행을 마구 사들여 더욱 유명세를 탔다.
▦ 요즘 국제사회에서 테마섹의 인기가 상한가다. 중국은 외환보유액 중 2,000억 달러를 출연해 9월 '중국판 테마섹'인 국가투자공사를 출범키로 했으며, 일본과 대만도 유사한 모델의 국영 투자회사를 만들 방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아시아 금융허브'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판 테마섹'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금산분리 정책이 도마에 오르자 중간 단계로 테마섹 같은 국내자본이 해외은행을 인수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늦게나마 눈을 뜬 것은 반갑지만, 지금껏 뭘 믿고 '금융허브' 운운했는지 궁금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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