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전후(戰後)세대’라면 봉황무대를 밟지 않고는 야구선수가 될 수 없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4개 전국대회 중 가장 늦게 탄생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하지만 유일하게 지역예선 없이 열리는 봉황무대는 스타의 산실이자 한국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봉황대기가 낳은 최초의 ‘빅스타’는 광주일고 선동열(현 삼성 감독)이었다. 훗날 ‘무등산 폭격기’가 된 선동열은 10회 대회였던 1980년 경기고와의 1회전에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구장) 개장(1959년 8월20일) 이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수립했다.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박노준(SBS 해설위원)과 김건우(LG 트윈스 해설위원)는 오빠부대의 ‘원조’였다. 투타에서 고교무대를 평정했던 둘은 11회 대회에서 선린상고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박노준이 홈 슬라이딩을 하던 중 왼쪽 발목골절의 중상을 입은 탓에 문병권 성준(현 롯데 코치)
류중일(현 삼성 코치) 등이 버틴 경북고에 우승기를 넘겨줘야 했다.
훗날 ‘싸움닭’으로 명성을 날린 군산상고 조계현(현 삼성 코치)도 빼놓을 수 없는 봉황 스타. 조계현은 2학년이던 12회 대회 때 장호익과 배터리를 이루며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조계현은 대구고와의 8강전에서는 탈삼진 18개의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 3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산고 박동희도 봉황기를 빛낸 별 중의 별이다. 그는 15회 대회에서 한국야구사에 전무후무한 평균자책점 0이라는 위업을 세웠다.
‘황금 학번’으로 불리는 92학번들도 봉황무대를 거쳐 스타로 발돋움했다. 공주고 박찬호(현 휴스턴)는 1학년이던 19회 대회 때 휘문고 박정혁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3학년이던 21회 대회에서는 2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장래 빅리거를 예약했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에서 뛰다가 국내로 돌아온 조성민(한화)은 21회 대회 선린상고와의 결승전에서 1피안타 1실점 완투승에 2점 홈런까지 날리며 신일고에 대회 첫 우승기를 안겼다.
요미우리 간판 타자 이승엽과 롯데 좌완 주형광은 93년 23회 대회에서 각각 투수와 타자로 만났다. 당시 촉망 받는 왼손 거포였던 부산고 주형광은 경북고 좌완 에이스 이승엽에게 2점 홈런을 뽑아내는 등 타자로 맹활약하며 모교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양준호 인턴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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