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번 통일하기가 그렇게 힘들까. 우리나라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원이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주요 정책을 두고 상반된 발언을 내놓았다.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대책 중의 하나인 '포이즌 필'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각각"도입 검토""도입 불가"를 외쳤는데, 기업들 입장에서는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답답할 노릇이다.
전홍렬 금융감독원 부원장은 24일 정례브리핑에서 "일본이 포이즌 필을 도입했고 국내 기업들의 요구가 잇따르고 있는 만큼 포이즌 필 등의 도입 필요성이나 적합성 여부 등에 대해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KT&G에 대해 경영권 공략을 시도한 전력이 있는 국제적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이 삼성전자를 M&A 시도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고 있는 것을 두고, 이에 대한 대책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전 부원장은 "일본이 2006년 5월 포이즌 필제도를 허용하면서 이미 350여개사가 도입했다"며 "일본 법원도 주주평등의 원칙이 중요하지만 다수결에 의한 주주 총이익이 더 중요하다며 적법 판결을 내린 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적대적 M&A 방어책은 법개정 사항인 만큼 검토과정을 거쳐 때가 되면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시각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권 부총리는 이날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주최 제주 하계포럼에서 "최근 일본 기업들이 포이즌필 등을 도입한다고 하는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지금 우리의 제도는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벗어나 있지 않지만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면 벗어나게 된다"고 강조했다.
두 기관의 엇박자 행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책금융기관 민영화와 금산분리 원칙을 두고도 충돌한 바 있다.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 12일 "금융은 민간이 맡아야 한다"며 우리금융지주 대우증권 등 정부 소유 금융회사의 조기 매각을 주장하자, 권 부총리가 바로 "해외 대형 개발금융 수요 등을 고려할 때 민간 국내 금융회사의 역량으로는 부족하다"며 반대했다.
금산분리를 둘러싸고도 윤 위원장과 권 부총리는 각각 "재벌의 은행소유 허용 필요" "산업자본의 은행진출은 불가"라며 대립했다.
정부기관이라고 해서 항상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해당 쟁점사항의 경우, 법 개정 사안인 만큼 재경부의 발언에 당장은 무게가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러나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두 기관이 핵심현안에 대해,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상반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재경부와 감독당국이 부딪힌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정권 말의 '레임덕'으로 연결하는 시각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포이즌 필(poison pill)
'독약 처방'이라는 의미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기 위해 기존 주주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적대적 M&A 위협이 생길 경우, 기존 특정 주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주식을 매수할 수 있게 하거나, 혹은 비싼 가격으로 주식을 팔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주주평등주의에 어긋나 국내법상은 금지돼 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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