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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0> 베를린- 단편적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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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20> 베를린- 단편적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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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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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반(反)나치 시위.

1992년 11월8일 오후 2시, 나는 베를린의 비텐베르크 광장에 서 있었다. 그보다 한 달쯤 전 빌리 브란트의 장례식 때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가 제안한 반(反)인종주의 시위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통일 뒤 옛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일부 독일인들의 외국인 배척 움직임은 그 즈음 꽤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 해 8월 로스토크의 이민자 숙소에 네오나치 젊은이들이 불을 지른 것은 그 두드러진 예일 뿐,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외국인들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헬무트 콜이 동독 지역 동포들에게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쉬이 실현될 것 같지 않았고, 실망한 사람들은 복고적으로 좌경화하거나 급진적으로 우경화했다.

다시 말해 옛 사회주의통일당(동독 시절의 집권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에 살가워지거나 공화당, 독일인민연맹 같은 네오나치 정당의 민족주의에 불현듯 매혹되었다. 뒤쪽 부류에게, 거리의 어리뜩한 외국인들은 제 좌절감을 발산하기 알맞은 표적이었다.

내전 중인 유고슬라비아에서 난민들이 대규모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던 것도 이들에겐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외국인의 정치적 망명권을 규정한 독일기본법 제16조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주류 정치권에서조차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날 시위는 통일독일의 이런 우경화 기미에 쐐기를 박기 위해 조직되었다.

2시가 되기 전에 이미 비텐베르크 광장은 시위에 나서려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광장 한켠엔 유럽 최대의 백화점 중 하나라는 카데베(KaDeWe)가 서 있고, 그 건너편엔 빌헬름황제 추념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폭격으로 날아간 머리 부분을 수줍게 드러내고 있다.

그 교회와 조금 떨어진 곳에 초올로기셔가르텐(동물원) 역이 모던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 역에서 길을 세 번 건너면 서베를린 최고의 번화가 쿠르퓌르스텐담(쿠담)이 시작된다.

이 날 행진은 쿠담의 반대쪽, 그러니까 동베를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텐베르크광장을 출발해 카를 마르크스거리와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루스트 광장(통일 전엔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이라 불렸다 한다)에 이르기까지 세 시간 여에 걸친 그 행진이 지금도 뇌리에 또렷하다.

갖가지 구호(“기본법 16조를 지켜내자” “우리는 외국인과 함께 살고 싶다” “우리는 나치즘에 반대한다” “파시즘을 박멸하자” “우리는 한 인류다” “외국에도 독일인들이 있다”)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동진(東進)하는 남녀노소 군중의 물결은 독일을 새로 유혹하는 나치즘의 낚싯밥을 단번에 쓸어내 버릴 기세였다.

한 손으론 기본법 16조를 고치려 하면서 다른 손으론 반-인종주의 시위를 거드는 정치인들을 위선자라 욕하는 플래카드도 보였다. 군데군데서 젊은 축들이 북을 치며 신명을 돋우었다.

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 바깥에서 온 사람들도 적잖았다.

동서 베를린의 경계 위에 서 있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날 땐 약간의 감회가 생겼다. 그 때 분단조국을 생각하는 것은 젠체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돌문을 손톱으로 가볍게 긁으며 통과했다.

그러면서, 30년쯤 전 존 케네디가 이 근처에서 발설했다는 “나는 베를린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슬며시 읊조려 보았다.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 독일이 하나가 됐듯, 내 조국도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때 잠깐 생각했다.

루스트 광장에선 동베를린 지역 리히텐베르크 역전에서 출발해 서진(西進)해온 또 한 무리의 시위대가 합류했다. 잘못하다 사람들에게 깔려죽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루스트 광장은 만원이었다.

바이츠제커의 연설이 광장 저 쪽에서 불분명한 웅얼거림 형태로 들려왔다. 그 순간 베를린은 정치적 이해타산을 넘어 인류애로 꽉 찬 듯했다. 독일 언론은 이 날 루스트광장에 모인 인파를 35만이라고 보도했다.

● 예술과 철학의 향기 비에 젖고■ 둘, 훔볼트 대학교<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어 의기소침해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독일의 정신적 재건을 위해 1810년 베를린대학교를 세웠다. 교육상이었던 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 다 이 대학의 설립자라 할 수 있다. 초대 철학부장은 <독일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강연으로 유명한 피히테였다.

베를린대학은 독일어권 대학으로서도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지만, 세워진 뒤 이내 독일의 지적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거기 가장 큰 공헌을 세운 이는 이 대학에서 가르치며 만년을 보낸 철학자 헤겔일 것이다. 베를린대학 교수가 된 것이 헤겔의 영예였다면, 헤겔이 여기서 가르친 것은 베를린대학의 영예였다.

베를린대학은 동독 시절인 1954년 실질적 설립자 이름을 따 훔볼트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훔볼트대학은 운터덴린덴 거리에 있다.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은 ‘보리수 아래’라는 뜻이다.

아닌게아니라, 중앙분리대를 겸한 보도 양쪽에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이 나무들이 보리수이리라.

처음 이 거리 이름을 확인했을 때, 나는 대뜸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 를 떠올렸다. 이 길과 노래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궁금하기도 했다. <보리수> 만이 아니라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전체가 빌헬름 뮐러(1794~1871)의 시에 선율을 붙인 것인데, 뮐러는 베를린대학 출신이다.

어쩌면 뮐러가 노래한 보리수가 제 모교 앞의 그 보리수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저 지레짐작일 뿐이다. 훔볼트대학을 둘러본 날은 비가 흩뿌렸는데, 그 비가 거리이름의 서정적 이미지를 항진시키며 나를 자못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훔볼트대학 본관 1층과 2층 사이의 중앙 층계참 벽에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의 마지막 명제가 새겨져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통일 이후에 본에서 날아와 이 대학을 접수한 교육관료들은 당초 마르크스의 이 유명한 명제를 벽에서 지워버리기로 방침을 세웠다 한다.

그러다가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 결정을 번복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운신을 떠나 마르크스가 이 대학의 가장 유명한 졸업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이름을 벽에서 지우려던 시도 자체가 어이없다. 교정 한켠에 서 있는, 나치즘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베를린대학생들의 추모비 앞에서 나는 잠시 경건해졌다. 내리는 비 탓에 더 경건해졌는지도 모르겠다.

● 故윤이상의 신념 아직 뇌리에…■ 셋, 베를린의 한국인들

베를린엘 가본 건 두 번이다. 92년의 첫 번째 방문 땐 열흘 남짓 머물렀고, 두 해 뒤의 두 번째 방문 땐 이틀 있었다.

첫 번째 방문 때의 첫 세 밤과 두 번째 방문 때의 일박을 나는 당시 베를린자유대학(동독 정부가 들어선 뒤 공산정권에 반대해 서베를린으로 넘어온 베를린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공부하던 H형에게 신세졌다.

두 번째 갔을 땐 H형이 학위 논문의 끝마무리를 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게 뻔했는데도, 당일 전화 한 통화 넣은 뒤 쳐들어가 신세를 지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내가 그리 넉살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첫 번째 방문 때의 뒤쪽 일주일 남짓은 아우구스타 거리의 베를린 선교단 기숙사에서 I 선생님께 신세지며 보냈다.

언론계의 대선배인 I 선생님은 그즈음 베를린 선교단의 초청으로 1년간 베를린에 체류하며 독일 통일 과정을 연구하고 계셨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전기밥솥으로 밥하는 것조차 서툰 손방이라, 결국 요리는 I 선생님 몫이 되었다. 갑년이 멀지 않았던 분이 20여 년 저쪽 새까만 후배에게 밥을 해 먹이셨던 것이다.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젊어서 파리에도 한 해 동안 머물렀던 I 선생님은 그 두 번의 유럽 체류를 견주며 이리 말씀하셨다. “젊어서 유럽에 왔을 땐 온통 아가씨들한테만 눈길이 갔는데, 이번엔 맛난 음식에만 생각이 가.”

두 번째로 베를린에 간 것은 작곡가 윤이상씨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94년 8월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그 다음달 8일부터 서울에서 열릴 윤이상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소위 ‘동백림사건’ 이후 20여 년 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고국 방문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날 아침, 베를린에 상주하는 한국 외교관 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앞으로 정치활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국 언론매체 앞에서 해야만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정치활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그런 ‘서약’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번 고국 방문을 빌미로 (한국 정부가) 자신의 그간 예술활동을 정치활동으로 몰아붙이겠다는 얘기 아니냐고 이 노작곡가는 말했다. 그런 서약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라는 것이었다.

윤이상씨와 인터뷰하는 것은 그의 분개와 한탄을 듣는 것이었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듯했다. 당뇨와 천식과 심장병 같은 지병이 이미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작곡가 윤이상은 이듬해 11월 독일에서 작고했다. 그의 고향 통영의 한 거리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로부터 다섯 해 뒤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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