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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9> 디지털 시대의 중세적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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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9> 디지털 시대의 중세적 순교

입력
2007.07.24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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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김선일씨가 살해당했을 때, 한국의 기독교계는 의견이 둘로 갈렸었다. 논점은 김선일씨의 죽음을 과연 '순교'라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것. 당시에 방송됐던 화면에서 볼 수 있듯이, 카메라 앞에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김선일씨에게서 순교자의 당당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냐는 것이다.

과격한 기독교 우익에서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그에게 순교자의 칭호를 주기를 거부했다. 예를 들어 서울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는 설교에서 "판이 그쯤 진행되면", "예수는 전도하고 죽을 일이지"라고 말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이렇게 무장세력에게까지도 예수를 전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선교하고 천당가면 될 일이지."

석 목사의 발언의 바탕에 '우익'의 정서가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촛불집회는 한국이 공산주의, 용공ㆍ공산화 되어가는 선두주자"라 보는 석 목사는 김선일씨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파병 말라고 하고, 부시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현대판 아말렉"이라고 규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말렉 종족은 기교인들에게 흔히 사탄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한편, 이보다 온건한 견해는 김선일씨도 넓은 의미에서 순교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국민일보에 실린 칼럼을 잠깐 인용해 보자. "'순교자'란 명칭에 인색하지 말자. 사실 우리가 순교자라고 숭앙하고 있는 성인들 중에서도 '왜곡된 순교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적지않은 친일파가 애국자란 묘비명 아래 잠들어 있듯이 말이다."

한 마디로 친일파도 애국자가 될 수 있듯이, 죽는 순간에 약간의 흠결을 남겼어도, 그를 아말렉으로 내치지 말고 "순교자"로 간주하자는 것. 이렇게 논리를 "왜곡"해가며 무리하게 "순교자"로 만들어 놓고 거기서 끄집어내는 결론이 황당하다. "'순교자 김선일'을 통해서 수많은 이 땅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들고 저 열사의 나라로 떠나기를 소망해본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토록 해외선교에 목을 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게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신학적 성격의 것일 게다. 기독교인들에게 '선교'는 절대적 명령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3:14) 이 때문에 세계에 단 한 곳이라도 비기독교 지역이 남아 있는 한, 선교 행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히 '기독교 제국주의'의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기독교계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선교지도'란 것에는 전세계가 이른바 복음화율에 따라 다른 색깔로 표시되어 있다.

전세계에 제 나라 깃발을 꽂으려 했던 제국주의자들의 심보와 비슷한 욕망을 본다. 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종족'이라 불렀던 것을 기독교인들은 '미전도종족'이라 부른다.

세 번째 이유는 경제적 성격의 것. 자본주의적으로 성장한 종교는 기업처럼 확대재생산을 해야 유지된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 시장은 최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배출된 인력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 교회는 재생산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203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외국에 보내겠다는 이른바 2030 계획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해외선교에 따르는 문제는 이 세 가지 이유와 관련있다. 봉사를 겸한다해도, 선교의 최종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전도종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있다.

고속성장에 길들여진 한국 개신교의 경제적 마인드는 수치로 환산되는 개종자의 수에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현지의 주민들 사이에 한국인의 순수한 봉사활동마저 '스텔스 개종활동'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릴 수 밖에.

또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과격한 복음주의를 받아들인 한국 개신교는 이념적으로 강한 친미적 성향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슬람권에서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세계선교협의회는 공공연히 "국가복음화"를 말한다. 하지만 종교와 세속의 분리가 없는 이슬람권에서 이런 목표는 당연히 문화침략을 넘어 체제전복의 음모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의 개신교가 아직 종교의 현대성에 도달하지 못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21세기에 '순교' 운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개신교는 여전히 광신적이다.

"서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바닷속 지진과 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했던 김홍도 목사의 망언은 개신교를 지배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을 말하자면, 개신교의 이슬람 지역 선교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위험한 이슬람을 빼놓고, 이미 기독교가 활발한 안전한 지역에 경쟁적으로 "중복투자"를 하는 게 "고질병"으로 지적되는 형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회에서는 아무리 비난을 해도, 기독교 정신에서 보자면 이슬람권처럼 위험한 곳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외려 동기만은 더 순수하다.

실제로 이번에 문제가 된 샘물교회는 개신교 내에서 꽤 개혁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가지 않으려고 하는 위험한 곳에, 그것도 선교사가 아니라 봉사자의 형태로, 교인들을 보낸 것일 게다. 이는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퍼지는 한류열풍을 타고 선교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개신교 주류의 얄팍한 계산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곳(0.02%). 광신적인 교회에서는 그 "사마리아 땅끝"에 기필코 복음의 깃발을 꽂으려 하고, 개혁적인 교회에서는 그 버림 받은 땅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베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궁극적으로 그곳에 복음을 심어야 하며, 그 일을 하다가 행여 사망한 이는 순교자라 부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슬람권은 종교의 부족이 아니라 종교의 과잉으로 고통받는 곳. 그런 곳에 또 하나의 종교적 근본주의를 갖고 들어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마디로 개혁적인 교회나, 광신적인 교회나, 종교의 다원성, 그것들이 지향하는 가치의 궁극적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중세적 마인드에서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는 믿음의 독단주의가 있는 한, 사회에서 아무리 말려도 개신교 신자들의 위험한 선교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디지털 시대에 중세적 순교의 드라마가 연출되는 상황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까

● "타종교인 개종"을 사명처럼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 nulla sallus) 이미 종교가 있는 사람들까지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믿음 때문일 게다.

하지만 이 신조는 원래 개신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것이었다. 이 독단적 견해는 멀리 1215년에 열린 4차 라테라노 공의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믿는 자들에게는 단 하나의 보편 교회만이 있고, 그 바깥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 독단적인 믿음에 따라 4차 라테르노 공의회에서는 안으로는 알비파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을 처벌하고, 밖으로는 성지회복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요즘은 개신교에서 중세 가톨릭의 악습을 물려받았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이단논쟁이 있었다. 1992년 감리교 신학대학 변선환 학장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파문(?)당한 것이다.

그때 그의 출교에 앞장섰던 분이 쓰나미 망언, 교회세습, 횡령사건으로 유명한 김홍도 목사.

서로 우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피를 흘리며 싸움을 하는 것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게 하나님 뜻에 부합할까? 후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수교단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김홍도 목사는 외친다. "자유주의 신학은 사탄의 도구다""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이단교수' 한 명을 척결하는 것이 교회 100개 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런 분들이 가는 데가 천당이라면, 그곳은 끔찍한 곳임에 틀림없다. 그런 몹쓸 데를 왜 자꾸 같이 가자고 세계적으로 권하고 다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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