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 규제로 발목이 잡힌 재건축 사업의 대안으로 리모델링 시장이 부상했지만, 성급한 시공사 선정과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 진도가 되레 후퇴하는 단지들이 늘고 있다. 리모델링 사업 추진에 필요한 주민 동의(3분의 2 이상)와 구청 행위허가를 받아 놓고도 수년째 제자리걸음 중인 곳도 상당수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수년 전 시공사를 선정하고도 조합원 추가분담금 인상에 대한 반발과 저조한 주민 동의 등으로 사업 추진이 가로막힌 리모델링 단지가 14곳 5,397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싼 공사비와 추가분담금에 대한 불만, 그에 따른 주민 동의 하락 등이 주요인으로 지적된다.
2005년 시공사를 선정한 서울 송파구 풍남동 미성아파트는 조합설립 인가를 받고 행위허가 신청을 준비 중이었지만, 시공비 추가분담금을 놓고 주민간 갈등이 커지면서 리모델링 무효 소송으로 번져 사업 추진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민 동의율이 하락하자 법원은 최근 1심에서 조합 측에 주민 동의를 다시 받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업 추진이 조합설립 단계로 퇴보한 셈이다.
2004년부터 리모델링을 추진한 서초구 잠원동 한신18차도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지만 건축심의 결과 당초 설계안보다 추가 면적이 적게 나오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2005년 사업 추진에 나섰던 용산구 이촌동 타워, 빌라맨션은 시공사를 뽑고 주민 동의를 받아 리모델링 공사가 가능하다는 행위허가까지 받았으나, 공사비 인상에 따라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주민 의견이 늘어나면서 사업 추진에 발목이 잡혔다.
송파구 방이동 한양3차 등은 시공사 입찰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의 담합 의혹 제기로 사업 추진이 보류됐다. 강남구 압구정동 미성과 서초구 잠원동 한신21차, 강동구 둔촌동 현대1차 등은 모두 사업 초기에 비해 늘어난 공사비 문제로 주민들의 리모델링 추진 열의가 주저앉았다.
전문가들은 당초 의욕적으로 추진됐던 리모델링 사업이 표류하는 원인에 대해 “공사비와 설계 등 사업 실체를 세심히 검토하기보다는 대형 건설사의 브랜드만 따져 시공사를 우선 선정해온 관행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들은 유명 건설업체가 제시하는 장밋빛 청사진만 믿고 시공사를 뽑지만, 막상 사업 추진 과정에서 설계비 공사비 등이 주민들의 기대를 벗어나면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쌍용건설 리모델링사업부 양영규 차장은 “사업 추진이 본격화하면 시공사와 조합간 분담금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커지기 마련”이라며 “시공사의 이견 조율 성패에 따라 사업 추진 여부가 엇갈린다”고 말했다. 올해도 30여개 단지가 리모델링을 위해 시공사를 이미 선정했거나 뽑을 예정이지만, 사업이 기대만큼 순탄하게 진행되는 단지는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예상이다.
A사 관계자는 “리모델링 가능 연한이 준공 20년에서 15년으로 완화되면서 15년 이상 된 단지들과 재건축에서 리모델링으로 사업 방향을 선회한 단지, 1기 신도시 일부 단지 등에서 상담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며 “건설사 이름보다는 업체가 제시하는 사업 내용을 세심히 검토해 시공사를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대림산업 이권재 차장은 “자원 낭비와 무분별한 재건축을 막기 위해 정부가 리모델링을 권장하고 있는 만큼, 관련 사업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규제 완화 등 제도 개선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태훤 기자 besa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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