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제1차 예비회담을 위해 홍콩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인 5월11일(월) 오후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연락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김 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책임자이자 한중수교 본회담의 수석대표였다.
김 수석은 대통령의 관심이 수교와 정상회담이라고 전제한 뒤 대통령이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한중관계에 큰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또 가능한 한 예비회담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본회담을 조속히 개시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날 저녁 이상옥 장관은 전화로 몇 가지 추가 지시를 내렸다. 신중하고 의연히 대처하라는 교섭전략과 함께 본말이 전도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본회담을 조속히 개시하자는 김 수석의 얘기는 중국측 입장을 들어보고 판단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더불어 교섭현장에서 어떻게 대처할 지를 내가 알아듣도록 융통성 있는 지침을 주었다. 이 장관의 지침은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는 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2월25일 제 13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전방위적 외교정책으로 '북방정책'을 천명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공산국가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6ㆍ23'선언을 계승, 확대 발전시킨 정책이었다.
노 대통령은 1989년 헝가리를 필두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몽골, 루마니아 등 동구 공산권국가와 수교를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1990년 9월 옛 소련과 수교를 성사시켰다.
노 대통령은 임기만료를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북방외교라는 용의 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는 심정으로 한중수교를 서둘렀다.
노 대통령은 1991년 11월12일 제 3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3차 각료회의 참석차 서울에 온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을 별도로 접견했다.
노 대통령은 "한중관계의 정상화가 일본과 북한, 미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를 촉진할 것이다. …양국관계가 더 이상 단절된 상태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조성해 놓은 선린우호관계를 단절시키는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양국관계의 회복을 강조했다. 첸 부장은 이 메시지를 핵심 지도자들에게 보고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후 80년대 초까지 한국과 중국은 서로에게는 금단(禁斷)의 땅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국제회의나 스포츠행사 등 비록 제한적 범위 안에서나마 직접 교류가 시작된 때는 1981년부터였다. 그해 3월 중국에서 개최된 유엔개발계획(UNDP) 회의에 한국대표가 처음으로 유엔여행증명서 사용을 조건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양국 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결정적인 '4대사건'이 있었으니 모두 한국에서 벌어졌다.
1983년 어린이날인 5월5일 중국민항기 1대가 공중 납치돼 춘천공군기지에 강제 착륙하는 이른바 '중국민항기사건'이 발생했다. 중국대표단이 처음으로 입국, 우리 대표단과 공식협상을 갖고 민항기와 승무원 그리고 승객은 중국에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중국대표단 일원으로 서울에 온 탄징(譚靜)여사는 9년 뒤 외교부 1등서기관으로 한중수교회담에 참여한다.
1985년 3월22일 한국영해를 침범한 중국해군 어뢰정 한 척이 우리 해군에 의해 나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는 공해상에서의 선상반란으로 인정, 어뢰정과 승무원을 중국에 인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콩주재 한국총영사관과 신화사(新華社) 홍콩지사간 접촉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은 양국간 직접교류의 폭과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토대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동서화합의 무대가 되면서 독일 통일과 공산권 해체의 기폭제가 되었고 냉전체제의 해소를 가져왔다.
노 대통령은 한동안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맡아 두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점도 중국측에 좋은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특히 우리의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옹은 개혁개방 선언이후 한국을 모델로 삼아 경제를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1989년 6월 텐안먼(天安門) 사태이후 서방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한국의 자본과 경제, 기술력은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수교를 더욱 절실히 필요케 했을 것이다. 마침내 양국은 1990년 11월 무역대표부를 상호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노 대통령은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실현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한 공동선언' 과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주도했다. 아울러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진전시킴으로써 한중관계 정상화에 중요한 장애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무한한 저력을 알고 역사와 민심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기에 한중수교라는 결단이 가능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중청소년문화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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