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관 가운데 내가 처음 들여다 본 곳은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 안에 있는 옛 거장(巨匠) 회화관(繪畵館)이다. 1992년 11월, 베를린에 머물며 드레스덴으로 하루나들이를 온 참이었다. 드레스덴에 딱히 볼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파리에서 베를린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이 작센주의 주도(州都)엘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츠빙거 궁전이 보고 싶어서였다.
옛 거장 회화관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18세기에 작센 선제후(選帝侯) 아우구스트2세와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3세가 수집한 것들이라 한다. 라파엘로, 렘브란트, 루벤스, 코레조 같은 이들의 그림이 걸려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나는 건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 밖에 없다. 시스티나>
그것도 그 그림이 워낙 유명해서 굳이 찾아보았던 것일 뿐, 그리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워낙 회화예술에 소양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을 테지만, 신심(信心)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을 테다. (그 뒤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에 대한 소양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얻지 못했다.) 나는 그 그림들보다 츠빙거 궁전 자체가 더 좋았다. (참 날씬하게도 지어 놓았군!) 궁전 뜰에 있는 연못 이름이 ‘요정의 욕실(浴室)’(뉨펜바트)이었다. 미역감는 요정이라니. 그림 형제의 나라다웠다. (그러나 그림형제는 작센 출신이 아니라 헤센주 하나우 출신이다.)
■ 츠빙거 궁전 옛 거장 회화관 유명
츠빙거 궁전을 나와서 브륄셰 테라세라는 길을 따라 알베르티눔 박물관으로 갔다. 왼편으로 엘베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보며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어떤 전투 장면들을 상상했다. 엘베강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게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인데,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라디오 방송극에서였다.
알베르티눔에선 신거장관(新巨匠館)과 그뤼네스 게뵐베를 잠깐 훑어보았다. 신거장관이라는 이름은 츠빙거 궁전의 옛 거장 회화관과 짝을 맞추어 지은 듯하다.
귀익은 이름의 인상파 화가들 작품이 드문드문 있긴 했으나, 작가들 이름이 대체로 설었다. 내 세속적인 눈엔 보물전시관인 그뤼네스 게뵐베가 더 흥미로웠다. 그뤼네스 게뵐베는 ‘녹색 궁륭(穹窿)’이라는 뜻이다. 아닌게아니라 전시실 가운데 하나가 온통 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우구스트2세가 세웠다는 이 박물관은 유럽에서 가장 큰 보물전시관이다. 귀금속 세공품들,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장신구 따위가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의 오랜 허영이 그 곳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뤼네스 게뵐베는 그 뒤(아마 새 천년 들어서일 게다) 알베르티눔을 떠나 드레스덴성(옛 작센 선제후들과 왕들의 거처)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드레스덴은 이 도시를 동서로 휘어 흐르는 엘베강을 경계로 신구 시가지로 나뉜다. 남쪽이 구시가고 북쪽이 신시가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정이어서 내 발걸음은 구시가에 갇혀있었다.
드레스덴 중앙역(이름이 ‘중앙역’일 뿐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 ‘중앙역’이라고 번역한 독일어 단어 Hauptbahnhof도 주역[主驛]이나 기간역[基幹驛]이라는 뜻이지 위치가 가운데라는 뜻은 아니다)에서 내려 빈 광장을 건너니 북쪽으로(엘베강 쪽으로) 프라하 거리가 뻗어있다. 나중에는 익숙하게 됐지만, 드레스덴에 들른 게 유럽에 온 지 고작 두 달 남짓 됐을 때라, 거리에다 외국 도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빈 광장에서 동쪽으로 뻗은 거리가 빈 거리였고, 그 빈 거리는 레닌그라드 거리(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라 부르겠지)와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닌그라드 거리는 프라하 거리와 기웃하게 평행이었다.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부다페스트 거리도 나왔다. 빈, 프라하, 상트페테르부르크, 부다페스트...... 죄다, 그 때까지 내가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었다. 프라하 거리 끝머리의 카페 프라하에서 샌드위치를 씹으며, 나는 그 도시들의 풍경을 내 멋대로 그려보았다.
드레스덴은 한 때 ‘엘베강의 피렌체’(엘프플로렌츠)라 불렸다 한다. 거리 전체가 박물관 같다는 피렌체처럼 드레스덴도 조형예술적 기품이 있는 도시라는 뜻이기도 할 게고,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에서(더 나아가 이탈리아에서) 한 때 많은 예술가들이 드레스덴으로 몰려왔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어느 쪽이든 ‘엘베강의 피렌체’라는 표현은 드레스덴보다는 피렌체에 더 큰 명예를 주는 것 같다. 부다페스트를 ‘동방의 파리’라 부르는 것이 부다페스트보다 파리에 더 큰 명예를 주듯.
드레스덴에 갔을 무렵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피렌체에 가보지 못한 나는 드레스덴을 ‘엘베강의 피렌체’라고 불렀던 관행의 적부(適否)를 피상적으로라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잠깐 들른 도시의 오리지널이 피렌체라면 피렌체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인 것이 분명하다. 그 복제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복제든 뭐든, 독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작센이라는 지명은 내게 언제나 독일의 속살처럼 들렸는데, 드레스덴은 작센의 허브가 아닌가.
■ 알베르티눔 박물관도 원형 그대로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드레스덴은 1945년 이후의 드레스덴이다. 1945년 2월, 이틀에 걸친 영국군과 미군의 폭격으로 이 도시는 말 그대로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패전은 그 이전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었던 터라, 이 대규모 민간인 살육과 파괴가 전술적으로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의 런던 공습에 치를 떨었던 영국 정부는 망설이는 미국을 설득해 이 대규모 보복전을 관철시켰다. 이 복수전은 영국으로서는 만족할 만했다. 드레스덴은 6개월 뒤의 히로시마(廣島)나 나가사키(長崎)와 달리 원자폭탄의 투하를 겪지는 않았지만, 사망자 수나 폐허화의 정도에서 두 일본 도시를 넘어섰으니까.
종전 이후 동독 정부는 드레스덴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을 거의 다 복원해 다시 예전 같은 고풍(古風)의 도시로 만들었다. 츠빙거 궁전과 알베르티눔을 비롯해 드레스덴의 ‘역사적’ 건물들은 대개가 전후에 복원된 것이다.
그러니까 드레스덴은 평양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전시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를 새로 세웠다는 점에서 두 도시는 닮았지만, 드레스덴이 폭격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되살린 데 비해 평양은 역사를 지워내고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드레스덴 폭격은 이 도시가 겪은 가장 커다란 참화였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전화(戰禍)는 아니었다. 드레스덴 사람들은 제 역사 속에서 짙은 피비린내를 여러 차례 맡았다.
이 도시는 18세기 중엽 유럽을 두 진영으로 나눈 7년 전쟁 동안 참담한 전화를 입었고, 나폴레옹 전쟁기인 1813년 8월에는 프랑스군과 6개국 연합군의 싸움터가 돼 5만 명의 사망자를 목격했다. 또 1849년에는 독일 혁명의 한 중심지로서 살상과 파괴를 겪었다.
■ 드레스덴=물가의 숲에 사는 사람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은 옛 슬라브어로 ‘물가의 숲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게르만인들보다 먼저 이 지역에 정착해 이 낭만적인 이름을 붙인 것이 슬라브인들이었다. 그 슬라브인들이 자신을 ‘물가의 숲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을 때, 그 물은 엘베강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들이 목격했던 숲은 아마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드레스덴은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여기저기가 푸르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오페라 <마탄의 사수> 를 쓴 것이 드레스덴에서인데, 작품 속의 숲은 보헤미아의 숲으로 설정돼 있지만 드레스덴 둘레 작센 지방의 숲도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었을 게다. 마탄의>
“네 신변이 걱정돼, 용속. 드레스덴의 스킨헤드들은 베트남 사람과 남한 사람을 구별할 줄 모르거든.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아이 앰 어 재퍼니즈 투어리스트’를 연발하는 수밖에 없어. 아니면 아예 피스톨을 하나 들고 가든지.”
베를린에 가는 김에 드레스덴에도 꼭 들를 참이라고 하자, 파리의 영국인 친구 앨리슨 K.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때 나는 앨리슨 말 속의 인종주의(유럽인 = 일본인 > 남한인 > 베트남인의 위계를 함축한)에 설핏 기분이 상했으나, 그것을 들추어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술자리에서의 농담이었고, 실제로 그 시절 동독 지역엔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네오나치 스킨헤드들의 공격 표적이 되곤 했고, 드레스덴은 동독 지역에서도 스킨헤드들이 유난히 설치는 도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즈음 영국의 관문인 히드로공항은 유럽연합과 미국 이외의 국적을 지닌 외국인 방문자에게 수모를 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영국 출입국 관리소의 인종주의가 독일 민간인들의 인종주의보다 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때 내 상상 속에선, 런던이 드레스덴보다도 외국인에게 더 쌀쌀맞은 도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도 앨리슨에게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녀의 농담에 속없이 깔깔거리고 말았다.
아무튼, 내가 운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드레스덴에서 스킨헤드는 만나지 않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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