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이달 초부터 유엔 국제회의 참석 등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언론은 때마침 취임 6개월을 막 넘긴 반 총장의 행보를 평가하는 기회로 삼았다.
독일의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지난 주 긴 인터뷰 기사를 싣고, “미국은 이라크 안정에 큰 몫을 하고 있다”는 반 총장의 말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라크 전쟁 갈등으로 불편했던 유엔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답한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반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분명 이라크 안정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미국의 기여와 많은 희생을 평가해야 한다. 향후 군사전략도 동맹과의 협의 아래 미국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유엔은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FAZ는 논평을 덧붙이지 않았으나, 비판하는 댓글이 여럿 올랐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독일 공영방송 ARD의 이라크 현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이라크의 혼란이 누구 책임인지 물은 것에 31%가 미국과 영국, 9%가 부시 대통령을 지목한 내용이다. 알 카에다와 저항세력 책임이라는 응답은 18%, 이라크 정부와 종교적 갈등을 꼽은 답은 각각 8%에 그쳤다.
■이 댓글을 올린 독자는 반 총장에게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라”고 충고했다. 독자 댓글에 비춰 유엔사무총장의 식견을 저울질하는 것은 불경스럽지만, 반 총장 편을 들 수 없는 것이 딱하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이라크 개입의 과오에 대한 비판이 거센 마당에 ‘미국의 기여’를 언급한 것은 외교적 수사로서도 적절치 않게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고른 총장’이란 딱지를 떼어내지 못한 처지에, 다른 곳도 아닌 유럽 한복판에서 미국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무모할 정도다.
■FAZ에 이어 반 총장을 인터뷰한 영국 더 타임스는 개인적 면모와 다르푸르 사태 적극 개입 등을 좋게 평가했다. 그러나 이라크 등 중동문제에서 일관된 친미자세를 비판했다. 취임 초 후세인 처형을 지지한 그가 국제문제와 내부개혁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발목 잡혀 있다는 평가다. 물론 본인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운신 폭이 좁은 그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국 가디언지 칼럼니스트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반 총장이 그나마 가진 권한은 침략행위 등 그릇된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반 총장이 이라크의 수렁에 함께 빠지지 않기 바란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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