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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7> 교섭준비는 비밀유지를 위해 3명이 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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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7> 교섭준비는 비밀유지를 위해 3명이 안가에서

입력
2007.07.11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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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를 전제로 한 비밀협상의 책임이 주어졌을 때 나는 이 무거운 짐을 같이 지고 갈 사람들이 극소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비밀유지 때문이었다. 보안이 회담의 성패를 가름하는 으뜸가는 관건이었으니 당연했다.

가장 먼저 만난 실무책임자는 당시 김석우 아주국장이었다. 내가 최초로 이상옥 장관의 비밀전갈을 받은 날은 1992년 4월22일이었다.

‘권 대사는 이 날을 비워두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내용의 비밀전갈을 전해온 사자가 바로 김 국장이었다. 그 무렵 이 장관은 중국과 몽골을 방문 중이었다. 연재 초기에 밝힌 것처럼 이 장관은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으로부터 ‘수교를 위한 비밀교섭’제의를 받고 교섭대표로 나를 염두에 둔 것이다.

김 국장과 함께 차출된 실무자는 신정승 당시 동북아2과장(중국과장)이었다. 갑자기 병이 나서 동북아2과장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은밀히 합류했다. 말하자면 언론의 시계(視界) 밖에 있는 나와 신 과장이 실무작업을 도맡아 교섭의 틀세우기에 나선 것이다. 비밀작업은 안기부가 용산구 동빙고동에 마련한 안가에서 시작됐다.

1992년 5월6일 이상옥 장관의 밀명을 받은 이튿날 안기부 H 차장보의 안내로 안가를 찾았다. 거기서 나는 신정승 과장과 함께 단 둘이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5월14~15일 베이징에서 예정된 제1차 예비회담을 불과 1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 날 저녁 안기부 K 차장이 안가로 찾아와 지원체제를 직접 확인했고 김석우 국장은 밤늦게 합류했다. 안가에는 약 100평정도 되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고 2층 양옥의 1층을 우리 사무실로 사용했다.

불과 1주일 안에 김 국장과 신 과장 그리고 나, 세 사람이 한중수교교섭에 관한 모든 실무를 맡고, 행정과 보안은 안기부가 책임진 비밀교섭의 화살은 그렇게 시위를 떠났다.

김석우 국장은 기자들과 외부의 눈을 피해 며칠에 한번 꼴로 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은밀하게 안가에 들러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거나 우리 대신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나와 김 국장 그리고 신 과장 등 우리 셋이 수교교섭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했다.

이상옥 장관은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직접 안가 또는 현장 부근에 와서 지시도 하고 보고도 받았지만 대부분은 김 국장을 통해 했다.

당시 안기부의 H 차장보와 K 차장은 모든 행정적인 업무를 포함하여 철저한 보안과 안전문제를 직접 챙겼다.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나를 청와대로 부르거나 밤중 또는 주말에 직접 안가로 와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하고 보고를 받았다. 김하중 당시 주베이징 한국무역대표부 참사관은 중국 외교부를 상대로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실에 근무하던 변종규 비서관은 제 1차 예비회담, 이용준 비서관은 2차회담부터 한국측 대표로 참석했다. 중국어 통역은 이영백 동북아2과 사무관이 맡았다.

이상옥 장관, 김종휘 수석과 안기부 K 차장 등 3자간 회담은 중요한 보고나 결정을 필요할 때 수시로 소집되었고 나를 포함한 약간의 실무자가 참석했다. 대통령비서실장과 안기부장, 이상옥 장관, 김종휘 수석 및 K 차장 등이 참석하는 5자회담이 때때로 소집돼 매우 중요한 보고와 결정을 내려줬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한중수교’의 과녁을 암중모색하는 양국의 소수 실무진에게 약 한 세기에 걸친 두 나라의 굴절된 역사를 극복하고 한중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는 수교교섭의 장애물은 크고도 많았다.

한국은 대만과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중국은 북한 일변도의 혈맹관계를 청산하며, 또 아직도 깊이 남아 있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민의 상처는 어떻게 씻어낼지….

무엇보다 한중 양국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쫓고 있을 북한과 대만, 그리고 기자들의 예리한 눈과 추적을 따돌리고 극비리에 수교교섭을 조기 타결해야 하는 실무진의 중압감은 지금에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양국 실무진이 이룰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사명의 의미를 알고 초조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한중 각 측에서 핵심지도자를 포함, 10여명에 불과했다.

한중수교는 정부수립 이후 외교부 현안 가운데 가장 우선순위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유무형의 압박감이 시시때때로 밀려오곤 했다. 내 개인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20년 넘게 이 과업에 대비해왔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실 동북아2과장 시절 나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대만을 방문할 기회를 여러 번 맞이했지만 기이하게도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과는 이처럼 묘한 인연으로 얽힌 것이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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