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트 S.는 라이프치히의 방송사 <미텔도이처 룬트풍크> 기자였다.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이는 나보다 하나 위였고, 말수가 적었다. 제가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미텔도이처>
그 인색한 대화마저 주로 서유럽이나 북미 출신 백인 동료들하고만 나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동료들에겐 물론이고 동유럽 출신 동료들에게도 눈빛이 살갑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인종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독일이 통일되고 두 해가 지난 그 무렵, 극우 민족주의나 인종주의는 옛 서독 지역보다 동독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운동량을 얻고 있었다. 옛 사회주의 형제국에 이주해 살고 있던 베트남인들은 그즈음 동독 지역 스킨헤드들의 사냥감이 되기 일쑤였다.
물론 베른트는 외국인 사냥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고, 배코를 치고 있지도 않았다. 베른트가 ‘동독 출신의 인종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내 편견은 옛 서독 출신의 또 다른 독일 동료 마리-아그네스 H.가 워낙 유쾌하고 너그러운 세계주의자였던 탓에 그 ‘대비 효과’로 생긴 것도 같다.
역시 나보다 한 살 위였던 마리-아그네스는 쾰른의 <도이칠란트풍크> 라는 방송사 기자였다. 19세기 독일문학의 높다란 봉우리를 만들어낸 혁명적 낭만주의 시인과 성이 같았는데(공인이나 저명인사를 빼곤 등장인물의 성을 밝히지 않겠다는 이 연재물의 원칙을 깬 셈이 돼버렸군), 남자 동료들한테는 자상한 누이였고 여자 동료들한테는 쾌활한 언니였다. 마리-아그네스와 베른트는, 이스라엘에서 온 미리암 S.와 함께, 35세 이하 기자들 집단인 ‘유럽의 기자들’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도이칠란트풍크>
그 무렵 나와 가깝게 어울리던 폴란드 동료 로만 G.는 베른트에 대한 험담을 낙으로 삼았다. 로만의 표현에 따르면, 베른트는 ‘전형적인 동독인’이고 ‘졸부(parvenu)’였다. 서쪽의 동포들 덕분에 하루아침에 부자 국민의 일원이 돼, 가난한 옛 이웃들을 깔본다는 뜻이었다. “베시(Wessieㆍ옛 서독 출신 독일인)가 거만하고 오시(Ossieㆍ옛 동독 출신 독일인)가 겸손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아. 오시가 기가 죽는 건 베시 앞에서 뿐이야. 외국인들 앞에선 프로이센 장교 흉내를 내는 게 오시야.”
로만의 이 말도 편견의 소산일 게다. 그 편견에는 제 조국과 독일을 얽어 맨 ‘과거사’도 반영돼 있었을 게다. 내가 베른트의 인종주의라고 여긴 것은 어쩌면 그의 수줍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나저나 베른트는, ‘유럽의 기자들’ 동료 서른 넷 가운데 내가 데면데면 대하던 서너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1992년 11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현황과 전망을 취재하기 위한 내 출장 일정에 그의 고향 라이프치히가 포함됐을 때, 나는 베른트에게 물었다. “라이프치히는 어때?” 물음만큼이나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작센에서 가장 고전적이지.” 그는 내게 윙크를 하고 입을 닫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그의 말투와 윙크에서 거드름과 무뚝뚝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한테라면 “고전적이라니?”라며 말을 더 이어나갔을 게다.
■ 고전미 뽐내는 중앙역사 내부
내가 작센의 ‘고전적’ 도시 라이프치히에 들른 것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FES)의 라이프치히 지부장 빈프리트 슈나이더-데터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이름을 딴 FES는 사회민주주의 가치의 선양을 활동방향으로 삼아 1925년 설립된 독일사민당 계열 재단이다.
많은 현대도시들의 첫 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공항이나 역사(驛舍)다. 나는 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이 도시가 ‘고전적’이라는 베른트의 말을 수긍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 역사는, 특히 그 내부는, 고전적으로 웅장했고 고전적으로 우아했다. 이 고전적 역사를 나오니 오른쪽으로 아스토리아호텔이 우뚝 서 있었다. 호텔 건물은 역사만큼 고전적이지 않았지만, ASTORIA라는 글자연쇄를 보며 나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크리스토프 하인의 어떤 소설에 라이프치히의 이 호텔이 나왔던 게 기억나서였다. 아스토리아호텔에서 크리스토프 하인으로 이어진 내 연상의 행로는 크리스타 볼프나 슈테판 하임 같은, 그 무렵 한국에서 읽히기 시작한 동독 출신 작가들에게 자연스레 다가갔다.
옛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에 온전히 동화할 수 없었던 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아마 새로운 조국 독일연방공화국에도 쉬이 동화할 수 없을 터였다.
괴테거리를 따라 내려가니 라이프치히대학이 보였다. 유럽의 오래된 대학들이 흔히 그렇듯, 라이프치히대학도 캠퍼스라기보다는 그저 건물들이었다.
15세기 초에 세워진 라이프치히대학은 한 때 독일 최대의 대학이었다. 공산정권 때는 카를마르크스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90년 통일 이후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철학자 빌헬름 분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구스타프 헤르츠, 로마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등 지성사의 거장들이 이 학교에서 가르쳤다.
넘치는 정열과 재능으로 당대 지식세계를 가로지르며 공직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던 라이프니츠와 괴테를 비롯해, 극작가 에프라임 레싱, 작곡가 슈만과 바그너, 철학자 니체, 소설가 에리히 케스트너 같은 이들이 이 학교에서 배웠다. 이들 가운데 라이프니츠와 바그너는 이 도시가 고향이기도 했다.
■ 괴테·레싱·슈만·바그너·니체…라이프치히대학이 낳은 예술가
이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19세기 후반 이 대학에 모인 한 무리의 언어학자들은 언어학에서 철학의 옷을 벗기고 역사학의 옷을 입히며 역사언어학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헤르만 파울, 카를 브루크만, 아우구스트 레스키엔, 헤르만 오스토프, 오토 베하겔 등 라이프치히대학의 이 언어학자들을 언어학사에서는 청년문법학파(Junggrammatiker)라 부른다. 그 이전엔 느슨한 은유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였던 음운법칙을 엄밀한 자연법칙으로 축성(祝聖)하면서, 이들은 ‘예외 없는 음운법칙의 발견’에 골몰했다.
언어학을 언어사로 환원하려던 청년문법학파의 이 무리한 시도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역시 라이프치히대학에 재학하며 그 자신 한때 역사언어학에 몰입하기도 한 페르디낭 드 소쉬르였다. 소쉬르 생각에, 언어의 내적 조직은 그 역사를 모르고도 온전히 이해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언어는 ‘기호의 체계’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 독일의 첫 노동자 정당 출범지
한 때의 이름이 카를마르크스대학이었다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게, 라이프치히대학은 마르크스주의 지성사에 깊이 연루되지 못했다. 이 대학에서 가르쳤던 일급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는 에른스트 블로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라이프치히는 독일의 첫 노동자 정당이 출범한 곳이다.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 모인 독일 각처의 노동자 600여 명은 페르디난트 라살을 중심으로 전독일노동자동맹(ADAV)을 조직했다.
ADAV는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이끌던 마르크스주의 정당 독일사회민주노동당(SDAPㆍ1869년 창당)과 통합해 독일사회주의노동당(SAPD)을 결성했고, SAPD는 1890년 할레 대회에서 당명을 독일사회민주당(SPD)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라살이 라이프치히에서 결성한 전독일노동자동맹은 오늘날 독일 최고 최대 정당인 독일사민당의 기원인 셈이다.
■ 토마스 교회선 바흐의 숨결이…
저 유명한 라이프치히 견본시(라이프치거 메세)의 초기 공간이었다는 마르크트 광장 부근에 토마스 교회가 보였다. 이 교회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생애 마지막 27년 동안 성가대 지휘자로 일했던 곳이다.
토마스 교회는 그 ‘고전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앞의 바흐 동상만큼이나 볼품없어 보였지만(건물 일부를 수리 중이어서 더 그랬을 게다), 그래도 나는 그 내부를 살피며 바흐의 숨결을 느껴보려 애썼다. 바흐가 바로크음악의 총괄자이면서 고전파음악의 파종자라면, 라이프치히는 그런 의미에서도 ‘고전적’이었다.
연단 바로 아래 큼직한 게시판 하나가 서 있었고, 이 교회에 들른 신자들의 기도가 적힌 종이들이 그 게시판에 겹겹 붙어 있었다. 나는 게시판 옆에 쌓인 종이 가운데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들의 하느님께 뭔가 기도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믿음이 없는 자가 기도편지를 써 교회 게시판에 붙여놓는 것은 신자들과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라이프치히와 인연을 맺은 음악가는 바흐나 슈만, 바그너만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일하며 이 악단을 유럽 최고수준으로 키웠고, 라이프치히음악원을 설립했다. 이 음악원은 오늘날 음악연극대학이 되었다.
토마스 교회를 나와 마르크트 광장을 지나서 니콜라이 교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니콜라이 교회는 서울로 치면 명동성당 같은 곳이다. 정치적 의미에서 그렇다. 니콜라이 교회는 1989년 동독 체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의 보금자리였다. 역시 ‘고전적’ 외양을 하고 있는 이 교회를 나는 밖에서 보기만 했을 뿐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허기와 갈증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니콜라이 교회와 라이프치히 대학 사이의 한 카페에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맛없는 빵과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젊은 여성 둘의 목소리였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는 그 한국어는 그들이 이 도시로 유학온 음악학도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인이 옛 동독 땅을 밟을 수 있게 된지 두 해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곳엔 유학생들이 있었다! 카페 창 너머의 빈터에선 외국인 실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야바위판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내가 라鎌좔″殆?온 목적을 생각해 냈다. 슈나이더-데터스와의 약속 시각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 슈타지 건물 등 옛 동독의 흔적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라이프치히 지부는 독일-소련 친선회관 건물을 거의 통째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건물 이름이 바뀌었을 테지. 내가 라이프치히에 간 게 소련이 해체된 지 한 해가 채 안 됐을 때라 그 이름을 관습적으로 쓰고 있었을 게다. 그 건물은 옛 슈타지(동독 국가안전부)의 라이프치히 지부 건물과 마주보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옛 동독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슈타지의 협력자였다. 감시와 밀고는 동독인들의 일상이었다.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 (2006)은 당대 동독 분위기를 차라리 온건하게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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