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국가가 완성되면서 문학이 윤리적, 지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그 자신이나 추종자에게 ‘문학 자체의 종언’ 선언과 다름없다. 한국문학 위기론의 주요 논거이기도 한 가라타니의 담론을, 연구 모임인 다중네트워크센터(waam.net) 소속 평론가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한국에서 문학의 종언은 1980년대 후반에 징후를 보였던 ‘과거형’이며, 이후 한국문학은 시대 변화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87년 이후 20년 간의 새로운 문학창작 경향을 연구한 결과를 담아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 (갈무리)을 펴냈다. 민중이>
■ 민중을 대체한 다중
조정환씨는 80년대 이전 한국문학의 주요 담지자였던 민중이 90년대 이후 다중(多衆ㆍmultitudes)으로 대체됐다고 진단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창한 개념인 다중은 산업구조 재편,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삶이 노동에 저당 잡힌 현대 사회에 개별적으로 저항하면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회적 주체다.
조씨는 “과거의 문학이 노동자를 위시한 민중을 민족-국민이란 주체 집단으로 형성하려는 전위적 양식이었다면, 오늘날 젊은 작가들은 다중의 사회역사적 잠재성을 문학적 틀에 담아내려 한다”고 말한다.
일례로 황병승, 강정, 김기택의 시는 존재 내부의 다양성을 그대로 해방시키는 다성(多聲)적 화자를 내세워 집중ㆍ집권의 민중적 서정이 아닌, 이질ㆍ혼종의 다중적 서정에 접근한다. 조씨는 “국가정치적 기능을 벗어나되 삶 내재적 경향의 표현을 포기하지 않는 문학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근대문학의 종언을 통해 열린다”고 해석한다.
■ 경계 넘나들기
이종호씨는 “국경에 함몰된 민중 개념으로는 포착 불가능한, 국경을 가로지르거나 그 경계에 서있는 존재들이 한국문학 내에서 시민권을 획득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배제되거나 주변부를 맴돌았던 ‘국경을 넘은 자’들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부상하는 현실에 대한 문학적 반영이다. 여기엔 분할과 경계의 또 다른 기원인 제국주의-식민지 문제가 결합되기도 한다.
이씨는 전성태의 <여자이발사> , 고혜정의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 , 김재영의 <코끼리> , 고종석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을 ‘탈(脫)국경 소설’의 대표 사례로 호명한다. 그는 “이들 작품은 고단한 일상에만 관심을 두거나 여전히 민족주의를 견지하는 태도를 취하는 등 소설 속 인물들을 자율적ㆍ역동적 삶의 존재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면서도 “이런 시도를 통해 지난 세기와 다른 삶과 존재 양식을 구축하는 과정을 발견하게 될 것”이란 기대를 피력했다. 고요한> 코끼리> 날아라> 여자이발사>
■ 자발적 고아, 태생적 고아
김미정씨는 배수아 소설의 인물을 ‘자발적 고아’, 한유주의 것을 ‘태생적 고아’로 명명한다. 전자가 혈통, 집단에 대해 반항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태도를 취한다면, 후자는 태어날 때부터 위계적 질서에 대한 경험이나 의식 없이 살아간다.
김씨는 “80년대 권위주의를 경험했던 90년대 작가들이 보편적 진리의 상징인 ‘아버지’를 애증한다면, 한유주 김애란 등 2000년대 작가들은 애초 현실의 적대 구도를 의식하지 않고 부유하듯 살아간다”며 “세대마다 자신이 체감하는 시대에 밀착해 존재론적 기반을 탐색하는 모습은 작가로서 대단히 윤리적 자세”라고 평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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